본문 바로가기

제비꽃의 느낌...16

김수영을 읽는 저녁(권상진) 김수영을 읽는 저녁 - 권상진 - 그날 저녁 나는 살아 있는 상처*들과 실랑이를 하고 쓰러지듯 방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세상과 등을 져 보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빌어먹을,세상이 나를 돌려세웠다 책꽂이 한 편에서 네루다와 체 게바라를 지나치고 김수영을 뽑아 드는 저녁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이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고개를 들면 풀과 꽃잎과 폭포가 있던 자리*에 던져진 양말과 먼지와 머리카락이 내 앞에 전부인 방 엎드린 채 김수영을 소리 내어 읽는다 주문 걸리듯 다시 혁명을 꿈꾸며 스크럼을 짜는 머리카락 먼지 던져진 양말 이를테면 나 아닌 것들 열 번도 넘게 김수영을 읽고 한 번도 그것들과 연대하지 못하는 나 지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장검처럼 김수영을 뽑아 들었지만 비어 가는 쌀독,그 빌어먹을 먹이 때문에 .. 2023. 10. 18.
외줄타기(시) 이현숙 외줄타기 이현숙 하루살이 날갯짓을 눈여겨보면 밝은 곳을 향한 발버둥이 있다 높은 곳은 오를수록 밝고 낮은 곳은 낮아질수록 어둡다 고지서가 날아다니는 낮은 방에서 엄마가 울면 따라 울고 아빠가 소리치면 납작하게 엎드렸다 줄을 타기 시작한 아빠가 높은 곳은 눈이 시리다며 찡그리자 엄마가 웃는다 웃음은 낮은 방을 삼키고 나를 삼킨다 하루살이는 여전히 가로등에 오른다 줄이나 빽이나 비빌 언덕보다 여문 동아줄이 낫다고 별이 총총한 새벽 집을 나설 때 아빠의 얼룩진 작업복이 부스럭거리면 게슴츠레한 눈으로 꾸벅 인사한다 “다녀오세요” 쓰윽 쓱 아빠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 아파트 벽이 환하게 밝아진다 심사평; 외줄을 타고 아파트 벽면을 도색하는 아빠의 노동을 희망의 빛으로 잘 치환하였습니다. (천수호 시인) 슬그머니 자.. 2023. 5. 12.
도전하기 시는 참 어렵다. 수필도 어렵다. 글은 다 어렵다. 가방 끈도 짧은데 뭘 쓰겠다고 덤비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지 모른다. 오래전, 블로그를 하면서 신변잡기를 올리다 어느 비 오는 가을 아침에 '가을 아침'이란 시답잖은 시를 하나 써봤다. 그 시답잖은 시를 읽으신 블친 시인 선생님께서 시를 써 보라고 하셨다. 남의 시도 잘 읽지 않았고, 사는 게 참 힘들던 시절이었다. 그저 소설만 읽어대던 내가 아차 싶었다. 한번 해볼까?라고. 곰곰 생각해보니, 여고시절 준비물이 간단하다는 이유로 글쓰기 반에 들었다. 억지로 한 편씩 써야 해서 써냈더니 선생님께서 소질이 있다고 계속 쓰라고 하셨다. 이후로 학교 행사에서 모두가 쓰는 문집을 만들고 뜻도 잘 모르면서 제목을 '나목'이라 지었다. 보라색 천을 덮어 표지를 만들.. 2022. 12. 5.
아버지의 무릎 아버지의 무릎 이현숙 조금씩 몸피가 줄던 아버지께서 함박눈 내리던 겨울 아침에 여닫이 문을 활짝 열고 강을 향해 앉으셨다 샛바람 들이치고 눈은 날리는데 먼 데 강가를 바라보시며 빛나는 강을 보라고 내 손을 잡으셨다 일곱 살 내가 문지방을 밟고 서자 아버지는 무릎을 내밀었다 아버지 무릎의 앙상함을 지나 허벅지를 밟을 때 푹 꺼지던 얇은 물렁거림과 작은 흔들림 지병으로 빠져나간 아버지의 살은 이후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살을 찾던 내 발은 세상 속에서 오래도록 흔들렸다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보았던 겨울 강의 눈부신 빛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마른 손이 이끌었던 그날처럼 창 너머로 몰려온 햇살이 가슴에 머문다 오래도록 ....................................... 2022. 9. 18.
동굴의 삶 동굴의 삶 이현숙 주택가 어느 반 지하 곁을 지날 때 무릎 아래 스며든 누런 불빛과 골목에 턱을 올린 창틀이 발목을 잡고 칼로 물을 베는 소리가 귀를 잡는다 여자의 반 울음 섞인 악다구니와 침묵으로 세간만 집어 던지는 남자 간간이 들리는 월세와 전기세, 가스비가 좁은 골목 위로 폭.. 2018. 5. 14.
홀로반가사유상(권상진) 홀로반가사유상 권 상 진 얼굴과 손등에 보풀보풀 녹이 일었다 눈물은 날 때마다 눈 가 주름에 모두 숨겼는데도 마음이 습한 날은 녹물이 꽃문양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오래도록 손때가 타지 않은 저 불상의 응시는 일주문 밖 종일 방문턱을 넘어 오지 않는 기척을 기다리느라 댓돌에 신발.. 2017.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