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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의 느낌...

김수영을 읽는 저녁(권상진)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23. 10. 18.

김수영을 읽는 저녁

    

- 권상진 -

 

그날 저녁 나는

살아 있는 상처*들과 실랑이를 하고

쓰러지듯 방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세상과 등을 져 보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빌어먹을,세상이 나를 돌려세웠다

 

책꽂이 한 편에서 네루다와 체 게바라를 지나치고

김수영을 뽑아 드는 저녁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이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고개를 들면 풀과 꽃잎과 폭포가 있던 자리*에

던져진 양말과 먼지와 머리카락이 

내 앞에 전부인 방

 

엎드린 채 김수영을 소리 내어 읽는다

주문 걸리듯 다시 혁명을 꿈꾸며 스크럼을 짜는

머리카락 먼지 던져진 양말

이를테면 나 아닌 것들

열 번도 넘게 김수영을 읽고 한 번도

그것들과 연대하지 못하는 나

 

지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장검처럼 김수영을 뽑아 들었지만

비어 가는 쌀독,그 빌어먹을 먹이 때문에

끝없이 김수영을 오독하는 밤

 

끝내 돌아눕지 않는 나를 기다리던

네루다와 체 게바라가

지루한 표정으로 서로에 기대어

졸고 있다

 

*살아 있는 상처, 풀, 꽃잎, 폭포는 김수영 시의 제목

..........................................................................................

 

오랫동안 비어 있던 티스토리에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서성거린다.

이미 권상진 시인의 시집에서 한 편 골라 올리리라 작정했는데 손은 노랑 표지의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을 주르륵 펼치다 내키는 곳을 읽는다. 머릿속은 얼른 권상진 시인의

시를 골라 올리고 모처럼 혼자인 저녁을 우아하게 보낼 생각에 반짝 설레고, 머릿속은 헝클어진다.

손과 머리가 따로 노는 탓에 시는 들어오지 않고 폭포와 꽃잎과 소리 내어 떨어진다, 병풍 같은

글만 굴러다닌다. 얼른 김수영 시집을 올려놓고 권상진 시인의 '노을 쪽에서 온 사람'을 집어 들었다.

다시 주르륵 펼친다. 아뿔싸! 이럴 수가! 우연이라기에 기막히다. 누가 옆에서 지키고 섰나?

하필 펼친 페이지가 '김수영을 읽는 저녁'이다. 오늘은 이 시를 올리라는 신의 계시인가 하며

올려본다. 우연치고는 기이하다.

 

*시 본문 쉼표 옆의 띄어쓰기는 시인이 일부러 띄어 쓰지 않았다. 띄어쓰기 칸에 쉼표가 있어

 그런가? 시는 마침표나 쉼표나 기호를 쓰지 않는 편이다. 쉼표 하나에도 의미가 부여되므로 

 붙여 쓴 의미도 분명 있을 게다.  

2023. 유월 어느 날, 가평 자라섬에서 수북한 수국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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