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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의 느낌...

동굴의 삶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8. 5. 14.



동굴의 삶

             이현숙


주택가 어느 반 지하 곁을 지날 때

무릎 아래 스며든 누런 불빛과

골목에 턱을 올린 창틀이 발목을 잡고

칼로 물을 베는 소리가 귀를 잡는다


여자의 반 울음 섞인 악다구니와

침묵으로 세간만 집어 던지는 남자

간간이 들리는 월세와 전기세, 가스비가

좁은 골목 위로 폭발물이 되어 쏟아졌다

지상으로 오를 수 있는 건 서로의 목소리뿐


검은 세단이 창틀을 가리고 주차되자

부부는 가만 주저앉았다

백열등을 끄자 난장(亂場)이 된 지하 단칸방은

순식간에 정적이 흐르고 방안은 한층 깊어졌다

태초에 인간은 동굴 속에서 살았다 했던가

불을 끄면 무덤 속 같은 평화가 오고

차가운 공기는 천장으로 올랐다

가시 돋친 말은 종유석이 되어 굳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사물의 분간이 쉬워졌고

모로 누운 쌀통 옆에 얼룩진 아이 얼굴

지하실에서도 아이는 자라고

종일 수그렸던 고개를 들게 하는 밤

부부는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어둠 속에 길을 찾는 밤이 깊어간다


남자는 느직느직 걸으며 가로등 아래 모인

하루살이의 날갯짓을 눈여겨보았다



(2018년

 제14회 동서문학상 맥심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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