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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별, 지상에 빛나다 (수상 소감) 친정에 갈 때면 늘 설렜다.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포근한 안식이 되고 세상살이 고달픔도 잊게 되어 자주 가려고 애를 썼다.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설렘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자주 가려던 발길은 자연스레 뜸해졌다. 지난 2월 어머니 기일에 영천댐 초입의 공원묘지에 들렀다. 부모님과 선조들의 흔적은 작은 비석에 몇 줄 글씨로 새겨졌다. 흔적은 오래도록 남아 자식에서 자식에게로 이어지리라. 그날 기계면 성계리로 갔다. 겨울인데도 따사로웠고 바람마저 잠잠했다. 고요함 속에서 봄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며 마을 속에 잠든 고인돌을 찾았다. 성계리 마을 회관에는 어르신들이 모여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 듯 반갑고도 서러웠다. 쭈뼛거리며 내밀었던 사탕 봉지를 받으시곤 커피를 타서 주시던 쪼글쪼글한 .. 2023. 12. 8.
수필; 칠성별, 지상에 빛나다(이현숙) 칠성별, 지상에 빛나다 (이현숙) -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형산강이 유유히 흐른다. 산에서 흘러내린 토지가 비옥해 작물이 풍성하다. 철 따라 부족을 이끌고 먹잇감을 찾아다니던 조상이 문명의 뿌리를 내린 곳이다. 그래서인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 기분이다. 일곱 고인돌이 있어 칠성마을이라 불리는 기계면 성계리다. 초입에 들어서자 빛바랜 벽화가 눈길을 끈다. 동굴 속에 아이를 안은 여인과 매머드를 잡는 원시인의 그림이다. 골목을 따라 들어서니 포항 행복마을이라 쓰인 반듯한 돌 위에 큼직한 별이 떴다. 별 속에 든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곗바늘을 얼마나 거꾸로 돌려야 저 시대로 돌아갈까, 조용히 눈을 감는다. 벽화 속 여인이 사내를 배웅한다. 긴 장대와 뾰족한 돌을 .. 2023. 11. 24.
김수영을 읽는 저녁(권상진) 김수영을 읽는 저녁 - 권상진 - 그날 저녁 나는 살아 있는 상처*들과 실랑이를 하고 쓰러지듯 방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세상과 등을 져 보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빌어먹을,세상이 나를 돌려세웠다 책꽂이 한 편에서 네루다와 체 게바라를 지나치고 김수영을 뽑아 드는 저녁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이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고개를 들면 풀과 꽃잎과 폭포가 있던 자리*에 던져진 양말과 먼지와 머리카락이 내 앞에 전부인 방 엎드린 채 김수영을 소리 내어 읽는다 주문 걸리듯 다시 혁명을 꿈꾸며 스크럼을 짜는 머리카락 먼지 던져진 양말 이를테면 나 아닌 것들 열 번도 넘게 김수영을 읽고 한 번도 그것들과 연대하지 못하는 나 지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장검처럼 김수영을 뽑아 들었지만 비어 가는 쌀독,그 빌어먹을 먹이 때문에 .. 2023. 10. 18.
캘리 수료증 받았어요. 이제 수채화 캘리는 끝났다. 수료증 받으려고 다섯 달을 배우고 한 달을 쉬다가 다시 한 달을 더 다녔다. 6개월이 채워져야 받을 수 있다기에 이 나이에 그게 뭐라고 또 욕심을... 나뿐만 아니라 같이 배우던 수강생들이 다 그랬다. 동지가 있어서 즐겁게 배웠다. 마지막으로 족자를 만들고 이젠 집에서 남의 글과 그림 찾아서 따라쓰며 연습하면 된다. 글씨는 어지간히 따라 흉내 내는데 그림은 영 꽝이다. 6개월간 행복한 성취감에 푹~ 빠졌다. 작은 병풍(글씨체가 계절마다 다르다) 한지에 그리기 2023. 6. 12.
외줄타기(시) 이현숙 외줄타기 이현숙 하루살이 날갯짓을 눈여겨보면 밝은 곳을 향한 발버둥이 있다 높은 곳은 오를수록 밝고 낮은 곳은 낮아질수록 어둡다 고지서가 날아다니는 낮은 방에서 엄마가 울면 따라 울고 아빠가 소리치면 납작하게 엎드렸다 줄을 타기 시작한 아빠가 높은 곳은 눈이 시리다며 찡그리자 엄마가 웃는다 웃음은 낮은 방을 삼키고 나를 삼킨다 하루살이는 여전히 가로등에 오른다 줄이나 빽이나 비빌 언덕보다 여문 동아줄이 낫다고 별이 총총한 새벽 집을 나설 때 아빠의 얼룩진 작업복이 부스럭거리면 게슴츠레한 눈으로 꾸벅 인사한다 “다녀오세요” 쓰윽 쓱 아빠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 아파트 벽이 환하게 밝아진다 심사평; 외줄을 타고 아파트 벽면을 도색하는 아빠의 노동을 희망의 빛으로 잘 치환하였습니다. (천수호 시인) 슬그머니 자.. 2023. 5. 12.
최고의 선물은 당신입니다 요즘 캘리에서 벗어났다. 처음엔 필압과 물감 번지기 등 재미가 솔솔 했는데 꾀가 나서 점점 붓을 잡기 싫어졌다. 이달엔 재등록하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약간 생겼다. 그 남은 시간은 슬렁슬렁 논다. 인터넷에 많이 있는 작품을 보고 따라서 쓰고 캘리 함께 하던 사람들과 따로 만나 한 시간씩 그리기로 했다. 시간 있는 사람끼리 카페나 문화센터 휴게실에서. 취미로 했던 거라 5개월간 즐겁게 잘 배웠다. 후련하기도 하고 그렇다. 마지막으로 한 그림이 '최고의 선물은 당신입니다'였다. 2023.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