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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 수(秀)가을호 신인문학상 수상작; 미늘쇠 계간 문학秀 신인문학상 수상작 미늘쇠 아라가야, 이름만으로도 아스라한 옛 왕국이 떠오른다. 앞 연지에 아라홍련이 자태를 뽐낸다. 연못 터에 묻혔다가 700년 만에 깨어난 연꽃이다. 하얀 아랫단과 선홍의 갸름한 꽃잎이 볼그레한 테를 둘렀다. 불꽃이 타오르는 듯 바람결에 꽃술이 살랑거린다. 별당 아씨 같은 정갈한 매무새다. 박물관 너머 능선이 봉긋봉긋하다, 역사를 이룬 사람은 모두 저기에 잠들었다. 며칠 품으면 깨어나는 알처럼 무덤들이 박물관을 포근하게 감싸고 안았다. 묻혀버린 가야인의 꿈도 다시 깨어나 저 아라홍련처럼 꽃을 활짝 피우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품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선다. 박물관 곳곳엔 다양한 토기와 철제품이 진열되어 있다. 장군이 사용한 갑옷, 투구, 칼, 화살촉이며 말에 쓰인 말갖춤으로 .. 2026. 9. 16.
계간 문학 수(秀)가을호 신인문학상 수상작; 버팀목 계간 문학秀 신인문학상 수상작 버팀목 줄지어 선 가로수는 몇 잎 남은 이파리마저 다 떨어뜨렸다. 거리엔 앙상한 가지와 줄기가 지나는 차량을 보며 섰다. 꽃을 피워 눈길을 사로잡던 봄날도 풍성하게 잎을 펼치던 여름도 지나고 이제 나무는 가지와 줄기만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도로를 넓히느라 우람하던 가로수를 캐내고 인도를 안쪽으로 밀었다. 그 자리에 여린 벚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지 삼 년이다. 나무는 저마다 뿌리를 내렸다. 끝내 뿌리 내리지 못해 말라버린 자리엔 다시 어린나무를 심었다. 몇 번의 겨울을 건너며 봄이면 작은 나무에도 몇 송이 꽃과 열매가 매달렸다. 문득, 그 곁을 지키는 버팀목이 눈에 든다. 저 나무는 어디에서 자라 저렇게 각 잡고 맞대어 서게 되었을까, 버팀목을 한참 바라본다. 한 그루에.. 2026. 9. 16.
꽃심(이현숙) 2026글로벌 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꽃심 이현숙 누가 저들을 깨웠는가, 누런 흙을 헤치고 요란한 발소리로 솟아나라고. 단단한 땅을 열어젖히는 소리에 지나는 바람마저 비켜 간다. 먼지 같은 싹 하나, 천지에 흔하디흔한 풀, 없어도 그만이지만 기어이 틈을 비집고 자리 잡는다. 바람에 실려 내려앉든, 새 부리에 물려오든, 다 불시착한 자리다. 씨앗은 눅진한 흙냄새를 맡으며 찬찬히 몸을 말아 쥔다. 깊은 어둠 속에서 물의 기척을 더듬는다. 밤낮없이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더 깊이 발을 뻗는다. 여린 것이 뿌리를 내리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경이로움은 줄기로 이어진다. 물길을 찾은 뿌리는 허공을 향해 키를 밀어 올린다. 흙의 숨결을 더듬으며 젖은 어둠을 끌어안고 높이를 늘린다. 뿌리는 햇살을 욕심내지 않는다. 오늘은 .. 2026. 6. 21.
제15회 독도문예대전 수상작(홀로섬, 가슴 한가운데) 홀로섬, 가슴 한가운데 (장려상) - 이현숙 - 한더위에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팔월 중순의 뙤약볕에도 기념관은 입구부터 와글와글 북새통이다. 관광버스가 늘어섰더니 단체관광을 온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 사람이 뒤섞인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국내외 사람 모두가 침묵한 채 전쟁의 흔적을 둘러본다. 공간의 조도가 낮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다에 뜬 다도해처럼 물결에 일렁이며 자리한 섬으로 보인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2층 통로의 네모난 틀이 눈길을 잡는다. 허리 높이의 유리 상자에 담긴 독도 조형물이다. 상자 앞면에 하얀 글씨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영토, 독도’라 적혔다. 동도와 서도가 망망대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우뚝 섰다. .. 2025. 10. 31.
수필 ; 홍등, 750년을 밝히다(이현숙) 2025 경북신문 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전 (은상 수상작) 홍등, 750년을 밝히다 - 이현숙 - 상주시 외남면 소은리 마을로 들어서자 풍성한 잎을 달고 선 나무가 눈에 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우람하다. 10m도 훌쩍 넘을 키에 매단 잎을 보니 푸르른 청춘이요, 사춘기 소년처럼 싱그럽다. 노거수를 먼저 눈으로 그러안으며 다가선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다가갈수록 골골이 쌓인 연륜이 그득하다. 얼마나 숱한 풍상에 시달렸을까. 노쇠한 몸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해 쇠지팡이에 의지했다. 발치부터 가지 끝까지 세월을 밀어낸 흔적이 아로새겨졌다. 나무 둥치는 하나가 아닌 둘로 가운데가 쩍 갈라지고 텅 비었다. 갈라진 한쪽 둥치 아래를 휘감은 옹이의 움푹한 눈이.. 2025. 7. 16.
나를 다독이는 시간 나를 다독이는 시간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삼십 대 초반의 내가 책 속의 주인공과 겹쳐진다. 육십이 되도록 기억하지 말자고 애써 잊으려 했던 날의 기억이다. 어쩌면 팍팍한 삶을 꾸리느라 그즈음의 기억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기에 자연스레 잊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책에서 주인공 여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주정뱅이 폭군 남편을 피해 떠나는 장면에서 그만 여인의 남루함과 초췌함에 눈물이 쏟아진다. 나는 당시 당구장으로 노름판으로 배회하는 무직에다 사행심에 물들어 밤이면 집을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사람과 살았다. 허영과 사행심에 사로잡혀 한 건만을 외치던 사람과의 삶은 고달팠다. 아이들은 쑥쑥 커 가는데 초조함은 나만의 몫이었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 돈벌이에 나서도 월세 내기 바빴다. 전기세며 가스비가 연체되어 .. 2025.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