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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앞 산의 품은 늘 좋다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21. 6. 30.

앞산의 저 끄트머리, 잣나무 사이사이로 길이 나 있다.
길은 스무 가닥 즈음으로 왔다 갔다 피톤치드로 온몸을 흠뻑 적신다. 
고개를 젖히자 찬란한 빛이 밤나무 이파리를 비집고 들어선다. 
내 남자와의 거리는 늘 이 정도! 가든지 말든지, 오든지 말든지, 나는 옆구리를 틀고 초록들과 눈 맞춤하며 걷는다.
아파트 8층 즈음의 높이다. 작년에 화도읍에서 앞산을 조금 손을 보아 길에다 멍석을 깔았다. 흠이라면 이것이 비닐 소재라는 거다.
이렇게 이어지는 길 초입에서 반대쪽까지는 천오백 걸음 즈음이다. 잣나무 아래를 오가면 이천 걸음이 훌쩍 넘어간다.
어디 갔지? 내 남자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 슬렁슬렁 혼자 걸으면 멋진 할아버지와 나란히 걷는 날도 있다.ㅎㅎ
산길 양 옆으로 수국이 숙덕거리며 본다. 나도 언젠가 키 크고 더 예뻐질 거라고! 가능성 만점^^ 나는 곱게 늙고 싶다.

 

아파트 정문에서 왕복 4차선 도로를 건넌다.

버스정류장을 지나 담벼락을 타고 1분 정도 걸으면 폭이 좁은 철제 계단이 나온다.

스물두 개의 계단을 오르면 한 사람 지나갈 정도의 오솔길이 이어진다. 양 옆으로 닭의장풀과 질긴 억새풀과 뒤엉킨 초록들이 들쑥날쑥 나를 당긴다. 제법 비스듬히 올라야 하는 길목엔 어린 소나무도 많다. 작년에 화도읍에서 약간의 손을 봤다.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둘레길을 만들었다. 멍석을 깔고 쉼터를 일곱 개나 만들어 놨다. 

어느 날, 보온병에 커피를 타고 쌀과자 세 개를 넣고 얇은 돗자리를 챙기며 책 한 권과 노트에 볼펜까지 넣은 가방을 메고 올랐다. 오전이라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 데크로 만든 쉼터에 자리를 잡았다.

흠~ 시원한 바람과 슬슬 넘어가는 페이지! 좋았다. 그냥 좋았다. 새소리도 음악이고 바람이 나뭇잎에 부대끼는 소리도 좋았다. 오래도록 있고 싶었다. 하지만, 멀찌감치 걸어가는 저 남자의 점심을 차려줘야 했다. 탁구 치러 갔다 오는 시간에 맞춰 보따리를 쌌다. 혹시 어디 가서 더 빨리 걸어 나를 두고 휑하니 가 버릴까 봐(위의 사진을 보면 알 만 하지 않나!)

 

오늘 같은 날은 닭개장을 팔팔 끓여놨는데 좀 전에 전화가 온다. 좋지 않은 예감은 역시나 틀린 적이 없다.

탁구장 언니야들 하고 오빠야들 하고 냉면 먹으러 간단다. 제길~ 내가 먹으러 가자 하면 덥네, 흐리네 하면서. 쩝!

마침 아들이 연락이 온다. 카톡! 며칠 전 회사 건물에 확진자가 나와서 집으로 오는 중이라고, 코로나 검사받고 결과 나오면 회사에 간다고 한다. 아들과 모처럼 둘이 닭개장에 밥 말아먹자고 했다. 오늘따라 맛있게 끓여졌다고 톡을 보냈다. 

"엄마, 오늘은 부대찌개가 당기네, 아니면 짜장면 시켜 먹을까? 감자탕도 당기는데 어떻게 하지?" 란다.

나는 오늘도 구석에 쿡 처박아 놓은 쓰레기 봉지처럼 몸을 말고 고개를 외로 틀어야 하나!

아니지, 두 남자를 두고 가방을 챙겨 슬그머니 나가면 되겠다. 보온병을 들고 길 건너기 전에 카페에서 뜨거운 라테 한 잔을 사서 넣어야지, 마음만 먹어도 기분이 덩실하다. 까짓 거 나도 사라질 줄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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