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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다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9. 12. 20.


그녀를 찾습니다.

출근길 이어폰을 길게 늘어뜨리고

물기 축축한 단발머리를 구깃구깃한 채로 눈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2시 10분 즈음으로 살짝 수그리고 걷던 그녀.

신발 뒤축이 푹 꺾인 날이 똑바로 신은 날보다 더 많지 않았나 싶은,

그 신발을 잘잘 끌면서 더운 날에는 시원한 커피를 들고 빨대를 쪽쪽 빨면서 걸어오고

추워지면 하얀 종이컵에 뚜껑 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후후 불면서 걸어왔던

둥실한 배가 옷에 착 달라붙어 민망함을 내 몫 인양 주던 그녀.

불끈하고 탱탱한 허벅지에 까만 바지가 위태롭던 그녀.

버스가 저쪽에서 오는 게 보이면 뜨거운 커피는 컵을 휘휘 돌리며 마시다가

담벼락을 향해 휙 던지거나 의자 위에 딱 얹어놓곤 했던 그녀.

나를 알고부터는 뜨거운 커피를 불쑥 코앞에 들이대며

"나는 이쪽으로 마셨으니 언니는 여기로 마셔, 여기!"

번죽 좋던 그녀가 사라졌다.

꼭 밥을 한 번 사주겠다고 했는데 전화번호를 알지 못하니 숙제를 못 끝낸 듯하다.

내 커피까지 사들고 와서 내밀었던 그 포실한 손등이 어찌 쉽게 잊힐까?

한 동네에 사니까 언젠가 만나 지겠지만 아침마다 마주쳤는데 근 한 달 정도 못 본 것 같다.

처음 한동안은 혹시나 하며 기웃거려도 보고 그녀 아파트 앞을 휘도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기도 했다.

참 이상하지?  커피 살 시간에 머리 좀 말리고 오라고 감기 걸린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봤을 때 정말로 감기가 걸려 허연 마스크로 얼굴을 반 가리고 가물한 눈으로 마주 봤었다.

원래 눈이 좋지 않다고, 그래서 눈을 자꾸만 찌푸린다고 쓸쓸하게 말한 날이었다.

명함을 달라니까 오늘은 없다고 다음 날은 또 잊어버렸다 해서 그러다 말았다.

다음 날 또 만나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다.

어제 아침 그녀가 말을 걸어 알게 된 또 한 명의 여인이 있는데 지난번 글(아침 인연)에 잠시

나온 여인이다. 그분도 까만 마스크를 즐겨 쓰고 다닌다. 그녀의 소식을 물었다.

그 여인의 말이 근처 마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회사가 시원찮아 그만뒀다고 했단다.

집에서 쉬고 있다더라고. 그 여인도 전화번호는 모른다고 했다. 요즘 앉으나 서나 나가나

들어오나 누굴 만나도 하는 말이 경기가 좋지 않아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말한다.

"있잖아요, 오래전 책을 읽어보면 외국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항상 경기가 좋지 않다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이렇게 세상은 굴러가나 봅니다."

좋은 날을 좋다고 말하는 사람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느 시대든 힘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 나름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지금이 가장 좋을 때라고 생각하며 건강과 직장과 그 외 모든 것에 감사한 날이다.

지금 어려운 날을 지내는 이들에겐 부디 좋은 날이 오기를 빌어드린다.  


쓸쓸하게 말하던 그때와 지금이 그녀로선 아슬아슬한 날이 아닐까,

"언니, 아직은 벌어야 돼"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녀의 고등학생 아들을 버스 정류장에서 한두 번 본 적이 있다.

그녀를 만나면 무조건 손목을 잡고 근처 어딘가로 들어가 뭔가를 사주고 싶은 마음이다.


출근길에 빈 커피잔을 보니 슬슬 잊히는 그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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