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담장 위에 처음부터 열매만 태어나서 까맣게 영근 것처럼 댕글댕글한 열매들이 마른줄기 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까만 눈동자들이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막바지 가을을 즐기는 듯하다.
버스 정류장의 아침은 어수선하다. 화장하는 사람, 옷매무새를 다듬는 사람,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사람, 가방 구석구석을 헤집는 사람, 손에 든 전화기를 보고 고개를 내밀고 차가 오는 방향을 번갈아 보는 사람, 개중에는 양쪽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세상 근심 혼자 다 짊어진 듯 발끝만 보고 걷는 사람도 있고 차가 도착할 즈음에 맞춰 다다다 뛰어오는 젊은이도 있다. 사람, 사람, 사람들......
날마다 만나는 단발머리 여인은 오늘도 어김없이 한 손에 커피를 들고 홀짝이며 다가온다. 그녀는 매일 버스 정류장에서 얼굴을 보는 편인데 나보고 언니라며 살갑게 웃는다. 40대로 보였는데 50대 초반이다. 그녀에게 나는 몇 살로 보이냐고 했더니 정확하게 내 나이를 맞췄다. 혹시 점쟁이? 좀 적게 봐주면 좋으련만 하며 웃었다. 나이는 얼굴에 나타나게 마련인가 보다. 어쩌면 내 나이보다 더 많게 보지 않았음에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들고 있던 커피를 마시라며 불쑥 내민다. 이쪽으로 마셨으니 저쪽으로 마시란다. 립스틱이 묻은 쪽과 안 묻은 쪽으로 구분이 된다마는 내가 마시면 하얀 종이컵 양쪽으로 붉은 장미꽃이 그려지겠다. 내민 손에 감사하며 마셨다. 달다. 나는 시럽을 넣지 않고 마시는데 달착지근해도 그저 좋다. 뜨거운 카페인이 분주한 마음을 잠시 가라앉힌다.
그녀는 시내 방향으로 가는 7번을 타고 나는 종점 방향으로 가는 7번 버스를 탄다. 버스는 양쪽에서 들어와 변두리 마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돌아 그녀와 내가 서 있는 정류장을 지나 반대 버스가 왔던 길을 간다. 버스가 엇갈리는 지점이라 자칫하면 잘 못 탈 수가 있다. 버스 앞에 놓인 네모난 글씨판이 초록색인지 빨간색인지 구분을 잘해야 하는데 그녀와 친해진 계기는 내가 타는 버스를 막무가내로 따라 타는 그녀에게 이 버스는 마석역으로 가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언젠가는 내 커피까지 한 잔을 더 사서 들고 왔다. 버스에 음료를 들고 타면 안 되는데 이미 뒤쪽으로 버스는 슬금거리고 다가왔다. 하루 두 대가 읍내만 오가는 버스라 기사분 얼굴도 익숙하다. 마침 그날 기사분은 7번 기사님 중 가장 편안하고 좋은 분이라 들고 타란다. 죄송하다며 버스를 타는데 밖에는 그녀가 있어 쏟아버릴 수도 없는 상태라 식은땀이 났다. 6년째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니 이런 날 찬스를 쓴 셈이다.
한 손은 찰랑거리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전화기에 넣은 버스카드를 찍어야 하고 가방은 팔에 걸쳐져 있고 가방에는 도시락에 책까지 있어 몸이 기우뚱 삐딱해진다. 커피 든 손이 무심결에 위로만 올라가고 뜨거운 김은 햇살을 받으며 차 안으로 향을 몰고 다닌다. 부산하고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린다. 친절한 기사님이 종이컵을 내밀며 한 잔 따라 달라고 하셨다. 다행히도 종점으로 들어오는 아침 버스에는 매일 같은 사람 몇 명뿐이라 쑥스러운 웃음을 띠며 죄송합니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음 날부터 빈 텀블러를 가방에 꼭 챙겨 다닌다. 출퇴근 길에 카페에서 커피 사 먹을 일은 없는 동네지만, 아침 일찍 준비하는 날 그녀에게 커피를 사 주고 내 커피는 담아서 사무실로 들고 와야지 하면서. 마음먹고 있어도 아침엔 커피 사러 갈 여유가 잘 생기질 않는다. 내가 버스 타러 가는 길에는 편의점이 없다.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그녀가 오는 반대쪽 편의점까지 가서 사 들고 오려면 출근 시간을 한참 앞당겨야 한다. 게을러서인지 잘 되지가 않아 밥을 사주겠다고 시간을 맞춰보자 했다.
말을 걸지 않았던 맨숭맨숭하던 때의 그녀는 대부분 이런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났다. 항상 커피는 들고 오면서 머리는 젖은 채로 빗질을 하지 않고 구깃구깃한 단발머리에다 뽀얗게 분을 바르고 화장을 하다 만 상태였다. 눈썹 위엔 허옇게 분가루가 묻어있고 겨우 립스틱만 칠한 날이 많았다. 하얗고 긴 줄이 양쪽 귀를 중심으로 길게 늘어져 하나로 된 부분은 둘러 맨 가방 속 전화기였다. 어떤 음악을 듣는지 모르겠다마는 대화를 할 땐 포동한 손으로 왼쪽 이어폰을 빼들고 말을 걸었다.
옷은 늘 치렁거리는 뭔가를 걸치고 검은색 흰색 위주의 옷을 입고 있었다. 여름에는 하얀 티셔츠에 까만 조끼를 걸치고 다녔다.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중 그녀를 힐끔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눈에 띄고 보고 있자면 내가 불편해지는, 아니 좀 답답해지는 그런 차림이었다. 지금도 비슷한 차림새로 나타나지만, 그 상태로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들고 오고 버스가 오면 컵을 휙~ 던져버린다. 놀라운 나머지 혀를 끌끌 찼는데 자주 말을 걸어오고 살갑게 대해 주는 그녀가 그동안 멀리서 봐오던 때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던가, 멀리서 볼 때 보다 가까이 대하다 보니 정겨운 그녀다. 이젠 컵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말을 하니 알았다고 하면서 들고 갈 수가 없단다. 사교적인 그녀가 나 아닌 다른 여인도 사귀어서 그 여인이 텀블러를 가져다주었는데도 버린다며 어느 날은 둘이서 절대 그러지 마라고 했다. 텀블러를 줘도 종이컵으로 마시고 휙 던지는 그녀다. 더러 의자에 놓고 가기도 하고. 며칠 전에는 건널목에서 보니까 얼른 마시고 또 휙 던진다. 봤다고 하기도 그렇고 모른 체 했는데 다시 조심스레 말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
가방을 뒤적여 들고 오던 간식을 꺼내 주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에 밥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기약이 없다. 그동안 립스틱 꽃이 피지 않은 쪽을 내밀어 더러 얻어 마셨던 커피와 커피 한 잔의 부담은 크다. 텀블러를 준 여인과는 나와 반대 방향 버스를 타는데 그와도 친하게 되었는지 셋이 밥을 한번 먹자고 한다. 그날이 오면 꼭 말해야겠다. 텀블러를 이용하라고.
오늘 아침에도 불쑥 커피를 내밀었다. 내가 탈 버스는 다가오고 고맙지만 가야겠다고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반말을 하는 그녀를 따라 속으로 내가 언닌데 하며 소심한 처세로 말을 탁! 놨다. 그녀 이름이 무엇일까? 이제야 호칭도 없이 고개 끄덕이며 만난 인연에 대해 우린 어쩌다 몇 년째 같은 곳에서 얼굴을 마주 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이 모든 것을 담쟁이덩굴이 봐 왔을 터다. 그녀와 나와 그곳을 스치는 시절 인연 모두를 지켜봤으며 오늘도 담담하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이다.
열매가 편안하게 앉아 있다.
위 사진 옆인데 잎은 지고 줄기는 버티기 중인지 한 폭의 추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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