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7일 일요일 오후 8시 16분에 큰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며 울먹였다.
그 시각 평소처럼 가족이 둘러앉아 한가롭게 주말 드라마를 보면서 각자의 내일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서 소리 내 엉엉 울었다.
영문을 모르던 아이들이 처음엔 장난인가 싶어 왜 그러냐고 묻다가 옆에서 따라 울었다.
그동안 11월 12월 1월 초,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뵙다가 1월 19일에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딸과 둘이 고속버스를 타고 다녀왔다. 그날이 마지막 뵌 모습이다.
요양 병원 간호사실과 연결된 침상 첫째 환자로 가슴에 심전도기를 팔에는 혈압계를
코에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시니 콧줄을 입에는 호흡기를 쓰고 계셨다.
눈도 뜨지 못하고 계시더니 귀에 대고 엄마랑 약속한 대로 생일 즈음에 온다는 약속 지키러
왔다고 내 이름을 대고 외손녀인 내 딸이 같이 왔다고 몇 번을 얘기했다.
목소리 높여 몇 번 얘기하는 중간에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 어머니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알고 계신다는 증거다.
옆에서 딸이 평소 외할머니 좋아하시던 노래 틀어드린다며 손 전화기에서 '한오백년'을 찾아
귀 가까이에 대고 들려드렸다. 이내 들으시고 활짝 웃으셔서 딸과 나는 함께 웃었다.
마지막 뵌 날은 서너 번 활짝 웃어주셔서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뵙고 돌아왔지만 돌아가셨다는 전화는 온몸을
옭아매듯 꼼짝할 수 없었고 깊숙한 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후로도 이전에도 그렇게 터진 울음은 없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셔서
많이 울었지만 그렇게 폭발하듯 터진 울음이 아니었지 싶다.)
사람들이 흔히 섧게 우는 사람을 보고 너희 엄마 죽었냐고 왜 그리 우냐고 하는 말이 이래서구나 싶었다.
살면서 통곡할 일이 모두 공평하게 두 번은 있나 보다.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때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험난한 세상 살아오면서 울어야 했던
그 어떤 날보다 더 많이 울게 됨은 당연하구나 한다.
아직 49재가 지나지 않은 상주로서 아무리 현대 사회엔 그런 거 따지지 않는다지만
경거망동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기는 뭣하다.
살아계실 적에 불효했으면서 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으나 아직은 믿기지 않는다 해도
돌릴 수 없고 1월 27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조금 더 정신이 좋으셨을 때 왜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찾아뵙지 않았는지 가슴을 친다.
이 글을 쓰니까 또 눈물이 난다.
벌써 7년 전이다. 우리 집에서 3주간 계셨는데
2012년 12월 12일 저녁 무렵 목욕시켜드리고 커피 좋아하시는 엄마와 딸과 함께
셋이서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좀 더 잘해드릴 걸 후회가 가슴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