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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이웃 사랑을 느끼며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7. 4. 17.

 노란 개나리를 연상케 하는 등산복을 입은 여인들이 새빨간 관광버스에서 끝없이 내렸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걸어가는데 무슨 기계에서 톡톡 하나씩 완제품이 떨어지는 듯하다.

내려선 여인들은 삼삼오오 혹은 혼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를 스치는 여인들을 보니 윗옷뿐만 아니라 배낭까지 노란색으로 멨 바지는 어두운 초록으로 입었다.

 그들과 엇갈리며 검정 구두를 신은 나는 평일에 관광버스를 타고 조금 먼 곳에 있는 산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지나치다 낯익은 얼굴이 스쳐 돌아보니 상대방도 돌아보고 있었다.

 오래전 아이들이 초등학생 시절에 잠시 한 건물에서 살았던 건물주인이었다.

한동네에 살다 보니 몇 년 전부터 여름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안부를 하며 산책길 한가운데 서서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십수 년이 지난 얘기를 몰아 하느라 숨쉬기 바쁠 정도였다. 정이 많은 주인은 연세도 칠순은 지났고 함께 살던 시절 사모님이라 불렀으니 내겐 여전히 '사모님'이었다.

 사모님은 예의 인자하신 모습과 눈길로 초라한 나를 감싸듯 하셨다.

 

 여름 산책로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전화번호는 서로 교환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길 한복판에서 전화기를 내밀며 번호를 찍으라셨다. 폴더 전화기를 보는 순간 어려웠던 그 시절이 아슴아슴 생각났다. 내 번호를 누르고 나니 이름을 뭐라 저장해야 사모님이 쉽게 아실까? 갸우뚱하며

"이름을 뭐로 해야 쉽게 아실까요?"라고 물으니 단번에 "그냥 이쁜이라고 적어!" 이러셨다.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이쁜이라고 하는데 싫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속없이 좋아라 깔깔대며 웃다 보니 길 한복판이고 사람들이 하나둘 지나치는 곳이라 민망하여 "말씀은 고마우신데요. 그건 아닌 것 같고 뭐라 해야 사모님이 쉽게 아실까요?" 다시 물어도 그냥 이쁜이로 하라고 자꾸 우기셨다. 양심상 그렇게는 못 하겠고 "그럼 우리 아파트 이름을 쓸게요"했다.

 입력을 끝내자 본론을 말씀하셨는데 아저씨께서 조그마한 땅을 놀리기 싫어 농사를 지어 오는데 푸성귀가 많아 별건 아니지만, 나눠 주고파서 그런다셨다. 감사하다며 차마 우리 공장 텃밭에도 많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주시면 감사히 잘 먹겠다고 언제든지 전화하시면 가지러 가겠다 했다.

 함께 살 때도 살뜰히 챙겨주셔서 감사했는데 또 챙겨주실 모양이다. 개나리 같은 모습으로 함박웃음을 주시고는 사모님은 아래로 나는 또 위로 각자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틀 후 저녁 무렵에 전화가 왔다. 사모님은 아저씨가 파를 뽑아 오셨다며 괜찮으면 가지러 오라셨다. 고등어조림을 하던 중이었기에 부랴부랴 챙겨놓고 운동화를 신고 뛰어나갔다. 쉬엄쉬엄 걸으면 10분 정도의 거리지만 사모님 성격상 들고 걸어오실 것이 분명해 뛰었지만, 집 앞 사거리 신호가 길어 생각보다 빨리 가지는 못 했다.

 도중에 전화가 와서 받으니 이미 중학교 정문 앞까지 와 계셨다. 금방 가니까 거기 가만 계시라 하고는 신호를 건너자마자 또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묵직하게 들고 계신 검정 비닐을 받아들고는 감사함을 전했다. 둘이 마주 보고 또 웃었다. 사모님은 건네주시면서도 행복하신 표정이었고 받아 든 나는 고마움과 감사함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겨울을 한 대서 보낸 움파는 실하고 좋아 보였다.

 

 집으로 와 파를 꺼내니 생각보다 많고 초록보다 하얀 부분이 더 많았으며 뿌리는 길게 뻗어 약이 될 듯하여 깨끗이 씻어 말려 냉동실에 보관했다.

 반은 다듬어 냉장고에 보관하고 반은 베란다 빈 곳에 심었더니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쑥쑥 자라나 보는 마음이 즐거웠다.

 사모님과의 인연은 근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서로 기억하고 좋은 인연으로 다시 이어지니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므로 욕먹을 행동은 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싶었다.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거나 사소한 인연인 듯 보여도 큰 인연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짧은 1년간 같은 곳에 거주한 인연이라 얼굴 마주친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도 파를 시점으로 사모님은 올여름 신선함을 더러 전해주시지 않을까 싶다.


 나눔은 있다고 누구나 나누는 게 아니다. 차고 넘쳐도 움켜쥐는 사람이 있고 모자란 듯해도 나누는 사람이 있다.

 봄이 시작되는 날 개나리 옷을 입은 고운 분을 만나게 되어 올해도 아름다운 한 해가 될 듯하다! (2017.3.28)






(4월 16일 이렇게 자라 다듬어야 하는데 베란다 청소만 하고 그냥 뒀다. 오늘 저녁 숙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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