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다 가만 들여다봤지요.
그대의 마음을......
나를 기다리던 이곳.
그대는 기린이 되어
멈칫멈칫 발걸음에 귀 기울이고
포갠 팔에 얼굴을 묻으며 시계를 보고
숨을 길게 내뱉으며 지루함을 뱉었겠지요.
사랑이 오기까지 1초가 1시간 같은
지루함은 극에 달했겠지요.
...........................................................................
앞집이 이사 온 후로 나의 퇴근 시간엔
마치 나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층계참에 앉아 있는
한 남학생을 자주 만났다.
처음엔 멋모르고 성큼성큼 오르다 웬 아이가 이곳에서? 라며
돌아보고 비밀번호를 손으로 가리고 문을 열었다.
2층에 들어서는 계단에 앉아 있어서 살짝 불편했다.
2층에 오르면 바로 들어서는 집에 여드름투성이 여학생이 산다.
마주 보는 곳이 우리 집인데
어느 날은 그 학생이 우리 집 옆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있었다.
다음엔 그 남학생이 우리집 계단에서 두 계단 위로 올라앉아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이후론 민망할까 봐 안 하던 인사를
내가 먼저 하면서 "안녕!"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안녕"이라고 했다.
어떤 날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계단을 오르니
둘이 나란히 앉아 얘기하고 있기도 했다.
5시 퇴근이라 집 앞에 도착하면 보통 5시 17분에서 20분 사이인데
평일이면 거의 매일 남학생을 만나다시피 했다.
속으로 저러고 공부는 언제 하나? 남학생 엄마는 학교 끝나고 내내
여학생 집 앞에서 기다리는 아들을 알고 있을까? 이런 생각도 했다.
정성이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둘이 얼마나 좋으면 저럴까 싶기도 했다.
가만 보니 봄부터 여름이 지나고 가을까지도 변함없이 남학생은
먼저 와 여학생을 기다렸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이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11월 말 즈음에 계단을 오르다 이렇게 붙인 종이가 있어 유심히 바라보며
그 학생들이 생각나 귀엽기도 해서 사진을 찍었다.
이 종이가 붙기 한 이틀 전 부터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으니 고3이라
수능 끝나고 이제 편안하게 만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올여름 밤의 소동이 생각났다.
밤 11시 고래울음 소리처럼 여학생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여름이라 베란다를 열어놓고 있었으니 11시 넘어
앙앙 울며 소리 지르는 통에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앞집 여학생이었고
대판 싸운 다음 날은 남학생이 계단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그 밤에 우리 딸이 무섭다며 화들짝 놀라 안방으로 뛰어와 나가보니
1층 화단에서 발로 건물을 끊임없이 툭툭 차면서 남학생이 그곳에 서 있었다.
시끄럽다고 말을 하고 돌아왔지만, 둘 사이가 심각한 모양인지
잠시 후 여학생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고 옥신각신 소리가 났다.
싸우더라도 건물 옆쪽으로 돌아가서 싸워야 하는데 아이들이라 안 들리는 줄
아는 모양인지 계속 그곳에서 실랑이를 했다.
이후로 며칠이 지나자 다시 남학생은 우리 집 앞에서 여학생을 기다렸다.
잘 풀어진 모양이었다.
티격태격하면서 사귀는 두 학생이 요즘은 통 보이질 않고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분홍빛 저 글이었다.
"우리, 데이트할래?"
이 학생들은 보아하니 남학생은 우리 맞은편 동에 살고 있고
여학생은 맞은편 동에서 우리 앞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
작년 여름엔가 재작년 여름엔가 '베란다 앞 사랑의 벤치'란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이 학생들이 그 벤치의 주인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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