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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깊어가는 가을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5. 11. 4.

 

얼마 전부터 온몸을 얻어맞은 듯 아프더니 급기야 목이 아파 침을 삼키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가벼운 산행이라도 즐겼는데 지난 휴일은 산대신 병원가고 모처럼

이틀을 꼼짝없이 집에만 있었다.

나름 열심히 운동해서 약했던 몸이 많이 건강해졌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작년 이맘때처럼 감기라는 녀석은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나 보다.

좋은 음식 많이 먹고 편히 쉬면 낫는다는 말대로 실천하다 보니 동글동글해짐이 느껴져

멀리는 못가겠고 아파트 네 동을 몇 바퀴 돌다 몸상태에 따라 집으로 오든지 몇 바퀴  더 돌겠다며

한 바퀴를 도는 중이었다. 한 바퀴 도는데 6분정도 걸린다.

 

커브를 도니 긴의자에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오른발을 의자에 올리고 왼 다리는

느긋하게 내려놓고 왼손은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오른손은 담배를 물고 통화중이었다.

딱 보여지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느긋한 어느 가장의 휴식시간이었다.

빠르게 걷기가 아닌 쉬엄쉬엄 걷다보니 본의 아니게 이 남자가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음... 나는 정말 애들 아니었으면 벌써 각자 갈 길 갔어! 아니, 내가 몇 번 말했잖아!"

라며 뒤에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계속 통화중이었다.

무심히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 앞을 지나는데 여전히 통화중이었다.

 

이젠 다소 추워진 날씨탓인지 그남자는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차림이 추웠는지

왼 다리는 오른 다리 위에 올라갔고 오른손은 왼쪽 겨드랑이 속에 들어 가있고 왼손은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저녁은 먹었어? 아니 낮에도 만두 먹었다더니 또 라면이야? 밥을 먹지..."

진지하고도 걱정 가득한 그 목소리는 상대방을 얼마나 애닯아 하는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 번의 통화내용으로 보면 그 남자는 아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의 통화이다.

 

하긴 친구에게 하는 전화일 수도 있고 형제와의 통화일 수도 있겠다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장난이라고 어찌 내 귀에는 불장난의 한 토막처럼 들렸다.

애들 아니었으면 벌써 헤어졌을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담배 한 대 피우러 아파트 밖을 나와 긴 통화를 하는

그 남자를 위해 긴 의자 앞에 가로등은 led 특유의 환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며칠 전 저녁나절 동네를 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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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감기가 심하니 꼼짝하지 마라고 잡아두는 바람에 목욕탕을 가지 못하다가

어제는 말리는 식구들이 없는 틈을 이용해 퇴근 후 간단히 저녁을 먹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쉬엄쉬엄 걸으며 소화도 시키고 감기퇴치용으로 목욕탕에 딸린 숯가마에도 가볼 참으로 건널목을 건넜다.

다시 작은 신호를 기다리는데  향수 냄새를 확 풍기며 까만 레깅스위에 가죽 반바지와 짧은 가죽재킷을

입고 앵글 부츠를 콩콩대며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리여리한 여인이 내 앞을 타박타박 걸었다. 

몇 걸음 뒤에서 추레하게 걷던 내 앞에서 좀 전부터 서 있던 자동차 문이 열리고 나이 지긋한 아저씨와

그녀는 반색을 하며 인사를 나눈다.

아저씨는 조수석에 두었던 외투를 잽싸게 집어 뒷좌석으로 넘기며 그녀를 쳐다본다. 만면에 반가움이 그득하다.

그녀는 자동차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이렇게 오래간만에 뵈니 더 멋있어지셨.."  뒤에는 '네요' 이겠지.

길가에 서 있던 까만 그랜저는 건널목을 건너기 전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진한 향수가

내 시선을 끌어 그만 남의 대화를 듣고 말았다.

두 아파트 입구가 마주 보고 있는 편도 2차선은 데이트하는 사람들이 자주 기다리고 내리고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녀를 태운 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가로수 아래를 걸으며 흥얼거렸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가을이 깊어간다.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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