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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보석상자

어느 봄날의 기억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1. 4. 6.

  개울 건너 외삼촌 댁에는 외사촌 오빠가 셋 있었다. 

 촌에서 농사를 짓던 큰오빠는 배운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어 결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시골로 시집오겠다는 여자는 점차 줄어들던 시절이었다.

 근방에 소문을 내고 본격적으로 여자를 구하기 시작한 것은 큰오빠가 서른을 목전에 뒀을 때였다. 아무것도 해오지 않아도 된다는 명목하에 더러 오던 보따리 장사가 소개해서 스물아홉인지 서른 되기 전에 띠동갑과 결혼을 하였다. 올케는 당시 여고생이던 나보다 몇 살 어린 십 대 소녀였다.


 어린 외사촌 올케는 친정이 가난하여 입을 던다며 시집을 왔다. 민며느리는 아니었어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우리 집에서 큰 소리로 부르면 건넛마을 외갓집에서 답을 하던 사방이 고요하던 시절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둘 도시로 나가고 어린아이들도 눈에 띄게 숫자가 줄어들던 때였다.

 적막이 흐르던 시골 마을에 외사촌 오빠의 결혼으로 아이들 울음소리가 자주 들렸고 엄마는 친정 조카가 낳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개울 건너에서 들으며 흐뭇해하셨다. 연년생으로 내리 아이 셋을 낳았으니 산골짝 어느 계곡에서도 비탈에 기대선 나무들까지도 오빠 부부의 금실이 좋았음을 알고 있었다.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개나리가 필 무렵부터 가을걷이를 할 때까지 오빠 부부는 나란히 논밭을 다녔다. 철없던 올케가 오빠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기도 하고 귀에다 소곤대며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동네 어르신들은 그저 활짝 웃으셨다. 올케는 순정 만화에 나오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음을 자주 터뜨리기도 했다. 보기에 아주 순수한 사람이었다.

 긴 플레어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제법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뜨거운 여름엔 누런 밀짚 모자를 맞춰 쓰고 하얀 수건을 목에 걸고 다니기도 했다. 누가 봐도 잉꼬부부였다.

 가을이면 경운기 한가득 곡식이며 채소를 싣고 오갔고, 겨울이면 읍내 장으로 나가 두 딸과 막둥이 아들의 입을 옷과 먹거리를 두 손 모자라게 사 들고 오며 흐뭇하고 복에 겨워했다.

 그렇게 십여 년을 한눈에 척 봐도 잉꼬부부요, 금실 좋게 잘 살았기에 덕분에 온 마을은 왁자하고 생기가 넘쳤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오빠는 오토바이를 타고 영천 댐 둑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버스에 치여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침 인사를 뭐라 하고 나갔을까? 오토바이 곁에는 아이들 간식이 흩어져 있었단다. 삼십 대의 올케가 한동안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던 서러운 사연과 함께 동네는 점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줄어들었고 곳곳에서 한 숨 소리만 들렸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나자 올케는 봄바람과 함께 읍내 장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시 고모인 우리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걱정거리 하나를 얻었다. 올케는 날이 갈수록 립스틱 색이 진해지고 얼굴에 분가루도 점점 더 뽀얗고 두터워졌다. 눈두덩이는 연분홍 눈화장에 파란색으로 포인트를 긋고 속눈썹까지 길게 붙이고 나섰다. 봄바람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 셋은 고아가 되었고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엄마는 친정 피붙이라 늘그막에 걱정거리와 함께 일거리까지 늘어 팔자타령이 길어졌다.

 이후로 십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풍문에 올케는 택시 기사와 눈이 맞아 살다가 헤어지고 식당을 전전한다고 들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아이들 걱정에 뭘 사 들고 자주 왔는데 점차 시골로 오는 날짜가 길어지다 횟수가 줄더니 근래 몇 년간은 아예 무소식이란다. 어디에서라도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소식도 모르는 올케와 저세상으로 간 외사촌 오빠의 행복한 모습이 봄날이면 햇살속에 자꾸만 피어오른다. 안타까움이 가슴에 가득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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