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햇살곱고 맑은 가을날이었다.
토요일 오후 중간고사 시험을 끝내고 우리는 끓어오르는 피와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이름아래 친구네 집 순례길에 올랐다.
시골 구석에서 살다 시내 여고에 다녔으니 갈곳도 많았고
안 가 본 동네도 많았다.
그날은 단포 삼사관 학교 근처에 있는 정희네 집으로 가기로 하고
남희, 은예, 말숙, 해숙, 나와 경미가 같이 간 기억이다.(오래되어 확실치는 않지만)
정희에게 그 동네의 남학생 정보를 일단 물어보았고
우리는 저녁에 그 남학생들과 놀게 되리라는 막연한 설렘으로
기대를 안고 정희네 너른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 가득 널린 고추와 덩치 큰 어미소와 송아지를 비롯하여
안채, 사랑채....... 쪽마루가 붙어있는 건넌방이 있었다.
호기심 많은 여학생들을 끌어당기는 건넌방은 정희 오빠방이었다.
책이 많네! 하면서 하나 둘 그 방으로 들어가 주인없는 책을 보며
가을날 시인이라도 된 듯이 시를 낭송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러다가! 아마도 말숙이던가? 기함하는 소리가 들렸고
말숙이 손에 작은 사진이 들려있었다.
우린 순식간에 그대로 멈췄다 !
말숙이 손에서 남희 손으로 다시 해숙이...나 돌아가며
그 사진을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에 가야겠다며
허둥거리며 그 집을 나왔다.
뒤에서 정희가 왜 가냐고 부르는 소리에 그냥 가야겠다며
일손도 바쁜데 괜히 폐끼치는 거 같다는 말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린 버스 타는 곳으로 향했다.
여섯시에 막차는 떠났다 하고 다시 삼사관학교 앞 큰 도로까지
제법 먼 길을 걸어 나오며 숨가쁘게 사진 얘기를 했고
아마도 그날 정희네서 잤으면 우린 큰일 났을 거라며 안 오는 차를
하염없이 기다렸었다.
그 때 우린 느지막이 포항에서 오는 차를 얻어타고 영천 시내로 돌아왔다.
명함만한 사진속의 벗은 그림을 처음 마주했던 우리들은 기겁하면서
정희 오빠를 변태라고 이름지었으며 정희에게는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다.
문득 가을 햇살이 맑아서 옛 생각을 하다가 멀쩡한 오빠를 변태라
이름지었던 그 사건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난다.
그날 그 추억의 친구들 말숙이와 은예, 남희는 지금도 가끔 연락이 되지만,
해숙이와 정희, 경미는 소식이 없는데 그 친구들도 아마 가을이면
한 번쯤 생각이 났을 추억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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