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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보석상자

유년의 겨울 날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1. 2. 15.

 내 유년의 기억은 항상 먹을거리와 아버지다.

오래전 기억 저 너머의 겨울은 쌩쌩 부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에는 이파리 하나 없이 산도 들도 모두 휑하니 회갈색으로

덮여 있고, 아침에 깨어보면 작은 물웅덩이에도 살얼음이 얼어 있던 그맘때.

그런 초겨울 즈음이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나면 작은 등불 아래서 언니들은 책을 읽었고, 엄마는 해진 옷을 꿰매며

앉아 계시고 그 옆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목을 빼고 발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던

나는 지루함을 달래며 아버지의 발소리가 빨리 들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고 집 옆 고목이 윙~윙~ 바람에 맞아 길게 울던 때!

찬바람을 가득 묻힌 아버지는 숙아! 옥아! 번갈아 부르시며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오셨다.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는 양발을 떡하니 딸들에게 맡기시고 양말을 벗기라고 하셨는데

아버지의 발은 왜 그리도 커 보였는지 양말을 벗길 때는 크기도 하거니와

뒤꿈치가 거칠어 작은 내 손으로는 힘에 부쳐 낑낑대며 한참을 버둥거리기도 했다.

 그리고선 배가 아프다고 배를 만지게 하셨다.

그럴 때면 꼭 막내인 나를 불러서 아버지의 몸과 팔 사이에 앉히고선 이쪽저쪽 뒤척이시며 아프다셨다가

가렵다셨다가 때론 긁어달라기도 하셨는데 작은 손으로 아버지의 등등 북북 긁다가 조물조물

배를 만지다가 아버지 젖가슴에 난 털을 가지고 장난도 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아버지 가슴의 털은 두어 개였고 하나는 유독 길어서 잡아당기기가 재밌었다.

 

 얼마 후 옷섶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아무것도 모른 체 소리 나는 쪽을 긁다 보면 그곳에선

단팥빵이 나왔다. 그때의 빵 맛은 살아오면서 먹었던 그 어떤 빵보다도 맛있었던 거로 기억된다.

 나중엔 신기해서 아버지가 오실 때쯤이면 아버지의 품을 눈으로 죽 훑어보았지만, 어디다 숨기셨는지

꼭 빈손으로 오신듯해 섭섭한 마음이 들어서 샐쭉해 있으면 잠시 뜸 들였다가 슬그머니 불러

무릎에 앉히시고 또 보물찾기를 시작하게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품에선 겨울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른 봄까지 항상 먹을거리가 있었다.

아버지 덕분에 먹을거리가 귀하던 그 시절에도 단팥빵과 건빵을 실컷 먹었던 내 유년의 기억!

아버지는 그 많던 딸들 중에서 유독 막내인 나를 불러서  감히 엄두도 못내었던 아버지의 밥상에

겸상으로 앉혀주셨고 항상 흰 쌀밥을 그릇의 삼 분의 일 정도 남겨주셨고 생선이나 맛있는 반찬을

먹게 해주셨으며 늘 주변을 맴돌게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의 자리 뒤쪽 구들목에는 항상 작은 항아리가 있었다.

그 항아리에는 들깨를 갈아서 꿀과 함께 섞어 놓아 기침을 자주 하시던 아버지의 약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꿀을 엄마와 올케 몰래 큰 숟가락으로 한 숟갈씩 떠서 입에 떠넣어 주시면서

꿀떡 삼키라고 하시곤 둘 의 비밀을 만들기도 하셨다.

 철없는 나는 달콤한 그 맛을 못 잊어 자꾸만 아버지 옆으로 가 있게 되었는데 그때의 꿀맛을

어디에다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

 

 옷장 정리하면서 여기저기 일기장과 편지들을 보다 우연히 아버지를 생각하며 썼을

언제 쓴 건지도 모르는 글을 발견하고는 다시 아버지 생각을 한다.

이 글을 쓴지도 몇 년이 지난 것 같은데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가 그리운 날이다.

 아버지의 꿀단지와 아버지의 단팥빵!

 계절이 불쑥 내 곁을 오갈 때 환절기가 되고 이렇게 조금씩 햇살이 비치는 들녘을 보면 가슴앓이를 하듯이

아버지가 그리워지고 아버지 생각이 불쑥불쑥 나서 가슴 밑바닥이 묵지근하다.

마흔을 넘기고서야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씩 깨닫게 되고 되새김질을 하게 되었다.

 내 열여덟의 꿀단지를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사랑은 더는 받을 수 없었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큰 숟가락으로 푹 담아서 먹여주시던 그 사랑과 일주일에 한 번씩 일요일 오후 자취방으로 돌아갈 때마다

갈래머리를 땋을 동안 뒷거울을 들고 이리저리 비춰야 하는 막내딸을 바라보며 앉아 계시던 아버지의 잔잔한

미소의 힘으로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눈을 감으면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한 날이다.  

그리고 간절히 보고 싶다!


 * 하얀 편지지 두 장으로 쓰인 이 글을 3월 초 이사하기로 한 나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발견했다.

 이 글을 쓰고 있었을 어느 날을 생각하며 문득 떠오르는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음을 새삼 느끼며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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