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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보석상자

진달래가 곱게 피던 그때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0. 4. 22.

 

 

 

시골 동네의 이름중 안빠지는 이름이 '양지' 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동네는 늦잠이라도 자려하면 일찌감치

창호지를 지나 튀어 나온 내 이마까지 찾아오는 햇살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깨야 하는 정남향의 우리 동네 양지 첫집이다.

맞은 편에 음지 동네가 있다.

 

흐드러지게 봄꽃이 필때면  음지 뒤로 보이는 산허리에 분홍 물감을

뿌려 놓은듯이 진달래가 가득 피어 있었다.

위로 두 언니가 빈 병을 들고 진달래를 따러 다니고 병에 꾹꾹 눌러

담은 진달래는 해소 천식이 있으신 우리 아버지의 약으로 쓰였다.

초등학생이 된 나는 따라가겠다고 나서고 두 언니는 떼어 놓기 위해

도망을 다니기도 하고 몰래 뛰어 가기도 했다.

 

그 많은 진달래 무리에 겨우겨우 따라가서는 정작 꽃은 몇 잎 따지도

못하고 언니들한테 귀찮게 굴며 징징 댔던 기억이 난다.

꽃을 따다 병에 담으며 언니들은 좋아하실 아버지 이야기를 참 많이도

했다. 셋째 언니는 이 꽃이 익으면 아버지가 드시고 건강해 지실거라

아버지께 칭찬을 많이 받는다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그런 말을 들으며 건너다 보이는 작은 우리 집에 방문이 열려 있고

세 딸을 건너다 보며 앉아 계신 아버지를 가끔 확인하며 꽃잎을 땄다.

큰 소리로

 "아부지~~! 꽃 많이 따 갈게요! " 하면 잠시후 아버지는

 "오냐, 많이 따 오너라!" 하시고 내가 한 말과 아버지의 답은

몇 초간 사이를 두고 오갔다.

 

정작에 나는 꽃 따는 건 뒷전이고  그저 언니들과 꽃무더기 속으로

소풍 나온 소녀였다.

산을 내려 올 때는 두 언니에게 번갈아 업어달라 조르고 다리가 아프다며

앉아서 업어 줄 때까지 일어나지 않기도 했다.

집 앞에 다다를 때엔 두 언니의 꽃병을 꼭 내가 들고 가야한다며

안 준다는 언니에게 억지로 뺏아 들고는 늠름하게 아버지 앞으로 가서 내밀었다.

수고는 몽땅 언니들이 하고 집 앞 몇 미터 앞에서 부터 내가 들고 가겠다며

박박 우기고 들고 간 그 꽃을 보고 아버지는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칭찬을 들으러 뺏었던 그 꽃을 언니들이 딴 것임을 다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그래도 막내가 최고라며 잘했다! 잘했다! 하셨고

뒤에서 언니들은 입을 내밀고 동생만 이뻐라 하신다며 서운해 했다.

 

그땐 몰랐다. 아버지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러신 줄은......

아버진 속으로 얼마나 웃으셨을까?

집 앞에서 꽃병을 뻇는 모습까지 다 보셨을 테니 말이다.

 

가끔 추억하며 언니들은 내게 미웠다 한다.

아버지의 막내 사랑은 온가족이 당연한 거라 여겼단다.

흐드러진 진달래가 분홍으로 산허리를 휘감은 요즘 아버지가 참 많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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