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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보석상자

아버지 생각(영천 시 승격 행사하던 날)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09. 7. 19.

 

1981년 7월 1일이었다.

그날은 영천은 군에서 시로 승격되는 날이었고

그날을 위해 영천은 온통 시 승격 축하행사 준비로 들떠 있었다.

 

여고생이었던 나 역시 행사 일부에 참여하게 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의

무희복을 입고 무용 연습을 많이 했다.

영천 읍내 거리 몇 곳에서 많은 사람 앞에서 무용을 해야 하므로 학교의 명예를 위해

실수하면 큰일이니까 제법 긴 시간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행사 며칠 전 경주의 어느 학교에서 춤복을 단체로 빌려오신 선생님은

우리를 선녀로 만들어 주셨다.

치렁거리는 긴 비췻빛 치마와 긴 초록색 웃옷을 입고 허리는 검정 끈으로

낭창하게 조여 맸다. 땋았던 머리는 하나로 묶어 목 뒤로 가지런히 내렸다.

 

행사 당일 면 단위 첩첩산중에 살고 계시던 엄마와 아버지도 시내로 구경을 오셨고

많은 영천 군민은 시민이 된다는 들뜸과 설렘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만 해도 정말 좋은 구경거리이자 생활이 한 단계 올라서는 느낌이었다.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는 시골 우리 집에서 시내까지는 거의 한 시간 정도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했는데 지병으로 편찮으신 아버지는 그 길이 너무나

멀었던 모양인지 버스에서 지치신 몸이라 정작에 딸이 읍내에서 선녀 같이

꾸민 모습으로 무용하는 것도 못 보시고 자취방으로 오셨다.

잠시 쉬었다 북문통에서 행사하고 서문통으로 오면 거기서 보리라 마음먹었던

아버지가 몸을 추스르시는 동안 우리 행사는 끝이 났다.

 

행사가 끝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골목 입구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여전히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중절모를 쓰신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시며 여남은 걸음에 한 번씩 쉬고 가자 하시다가 먼저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자취 집은 가파른 언덕배기라 천식이 심하셨기에 숨소리가 쇳소리였다.

돌아보면 돌아가시기 스무날쯤 전이었는데 그때가 자취방 처음이자 마지막 걸음이셨다.

그래도 아버지와 같이 가겠다며 옆에서 거리에서 춤을 추며 사람들께 칭찬받은 일이며

들뜬 마음을 재잘거렸다. 가쁜 숨을 쉬면서도 막내딸의 얘기에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셨다.

내가 이뻤다는 둥, 아버지께 발짓을 이렇게 했느니 손짓을 저렇게 했다느니

수다를 떨며 올랐던 그 흙길이 참 좋았다.

 

좁은 자취방에 들어서니 엄마는 먼저 도착하셔서 저녁을 차리고 방도 치우고 계셨다.

소박한 저녁을 먹고는 아버지의 기침과 가래 끓는 소리를 들으며

여름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무슨 맘이었을까? 자랑이 꼭 하고 싶어서였을까?

대뜸 아버지 앞에서 무용복으로 갈아 입고는 낮에 시내에서

공연했던 그 모습을 보여드린다며 엄마와 아버지를 관객으로 하고

누런 전구 불빛 아래서  덩실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아버지와 엄마의 표정은 내가 본모습 중 가장 환한 얼굴이셨다.

그땐 아버지에게 작은 행복을 드린 줄 미처 몰랐다.

그저 막내딸이 추는 춤사위를 보시려고 아프신 몸을 이끌고 버스에 시달리며

일부러 걸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그 마음을 헤아렸다.

돌아가신 뒤에 생각해 보니 그 날 아버지와 엄마 앞에서 춤을 춘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웃음.

7월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해마다 7월이면 그 날의 춤과

두루마기와 하얀 반소매 메리야스와 함께 아련히 떠오른다.

어찌하여 마흔일곱에 나를 낳으시고 열여덟 해도 같이 못 지내고 가셨지만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커서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좋다는 말을 달고 살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약간의 질투를 하시는 듯하다. 

엄마가 그러셨다. 늙고 병든 아버지가 뭐 그리 좋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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