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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곁에

자가격리 기간이 끝나고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20. 4. 17.

 

이른 아침 5시에서 6시 사이면 문 밖에서 형부가 뉴스를 보며 부엌에 있는 언니를 향해 크게 말한다.  한 꼭지가 지나고 다시 한 꼭지가 나오면 형부는 다시 언니 등을 바라보며 오늘은 코로나 환자가 늘었다거나 외국에서 온 사람 중 확진자가 몇 명이라며 알려준다. 오늘은 어떤 뉴스가 나오는지 안방 침대에 누워서 듣는다. 6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울려야만 겨우 일어나는 내가 언니네서 지내면서 알람 대신 형부가 아침마다 전하는 뉴스를 들으며 조금 일찍 잠이 깬다.

 

언니네 와서 산 지 벌써 17일 째다. 그냥 작은 방에서 지내겠다는데 굳이 화장실 딸린 안방에서 편하게 지내라며 장롱 한쪽까지 싹 비워주었다. 남편과 딸과 내가 언니와 형부 둘이 사는 집으로 와서 당분간 지내겠다고 결정한 것도 우리 세 식구의 마음이라기보다 언니와 형부의 마음이 더 컸다. 올초부터 코로나 19 전염병이 돌기 시작할 때 속으론 이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대구 신천지 종교에서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전 세계가 코로나에 사로잡혔다.

작년에 독일로 공부하러 가겠다며 잘 나가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퇴직 후 일주일 만인 8월 말에 아들은 떠났다.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고 옷은 캐리어도 그리 크지 않은 곳에 꼭꼭 눌러 담더니 까만 가방에 노트북을 넣어 어깨에 매고는 싱긋 웃으며 떠났다. 떠나는 날 아들 친구 네 명이 집으로 몰려와 배웅을 하고 둘은 차로 공항까지 따라가 배웅을 했다. 딸은 동생이 긴 줄을 따라 접어들자 눈이 벌게지며 눈물을 흘리는데 정작 엄마인 나는 울지도 않고 옆에 섰다가 딸의 얼굴을 보고서야 눈물이 찔끔 났다. 그렇게 떠나보낸 아들이 코로가 19가 펜데믹에 이르자 다니던 어학원까지 문을 닫자 마지못해 돌아오게 되었다.

 

문 앞에 포장한 순댓국과 아이스라테를 사다 놓고 벨을 눌렀다. 잽싸게 돌아서서 아파트 뒤 화단으로 갔다. 딸은 한 발 앞서 달려가더니 메타쉐콰이어 베어진 그루터기로 살포시 올라선다. 뒤따라간 내가 옆에 서자 베란다에 아들이 있다며 보란다. 한낮의 햇살이 정남향의 베란다 유리를 빠짐없이 비추는데 그 안에 선 아들이 보일 리 없다. 딸이 형체만 보고 손을 흔들어 대더니 전화로 베란다 창을 열라고 말한다. 이 무슨 난리인지 아파트 옆 모퉁이에서 해바라기 하던 할머니 서넛이 둘래 둘래 쳐다본다. 아들은 창을 열고 히죽이 웃으며 "엄마" 하고 부른다. 돌아오는 날 몇 미터 앞에서 바라보기는 했어도 아래서 쳐다보니 그날 마스크에 가려졌던 얼굴 반쪽이 퀭하다. 머리는 단발에 가깝고 두툼한 수면 잠옷을 입은 채로 방금 두고 온 아이스라테를 한 손에 들어 보인다. 순간 가슴이 지릿하더니 눈물이 핑 돈다. 수요일 밤 돌아오는 아들을 아파트 마당에서 잠시 보고 사흘 만에 환한 낮에 얼굴을 본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얼굴이라 움푹 꺼진 볼과 도드라진 광대며 눈썹 뼈까지 긴 머리카락 아래로 목이 더 길어 보인다. 딸이 묻는다. 살이 얼마나 빠졌냐, 지겹지 않으냐, 답답하냐를 묻 나는 그저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집에 와 있으니 그것만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조금만 참자고 속다짐을 한다.

 

아들이 돌아오는 날은 남편도 딸도 모두 출근한 상태라 공항으로 마중도 못 가고 중요한 시기라 나라에서 제공하는 차편으로 돌아오라 했다. 남양주체육센터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다시 시에서 제공하는 택시를 타고 집까지 왔다. 아파트 마당에서 기다리다 만난 아들을 마스크를 쓰고 위생장갑까지 낀 상태로 멀찌감치 바라만 보곤 자가격리 기간이 끝나는 날까지 불편하고 아쉽겠지만 집에서 혼자 지내라고 했다.

남편과 나와 딸은 근처 언니네서 지내기로 결정을 했기에 아들이 돌아오기 전날 독일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우린 유럽 여행하는 마음으로 짐을 챙기고 자가격리 수칙을 프린트해서 아들 방 문 앞과 거실 벽에 붙여놨다. 아들이 도착하기 전 밥을 하고 가장 먹고 싶다는 부대찌개를 끓여놓고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올 때는 남의 집에 몰래 숨어들었다 들키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미리 나와야 했다. 어둠이 내리고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아파트 주차장 딸의 차 안에서 기다리며 이게 꿈인가도 싶었다. 아들이 도착하자 집 비밀번호를 잊었을까 싶어 알려주니 알고 있단다. 날마다 환기하고 자주 씻으라는 당부와 함께 현관 입구에 살균수 담아둔 것을 자주 뿌리라고 했다. 유럽에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우린 아들을 전염병 환자로 취급하고 행동했다.

 

아들은 도착 이틀 후 모두 출근하는 바람에 시에서 제공하는 차를 타고 선별 검사소에서 검사를 받았다. 아들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은근한 걱정을 하며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히도 토요일 아침 음성 판정을 받았다. 돌아오는 날 네덜란드 공항으로 갔다가 아홉 시간 이상을 기다렸다가 우리나라로 오는 비행기를 탔는데 꼬박 하루 걸려 집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 시간 내내 마스크를 벗지 않았고 밥도 딱 한 번만 먹었다며 배가 많이 고프다는 말과 귀가 아프다는 말을 했다. 마스크 끈이 조여 귀가 아픈 지경에 이른 것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음성 판정을 받았으나 2주 격리 기간 동안 문밖에 절대 나가지 말라는 지침에 따라 남은 세 식구는 언니네서 아주 잘 지냈다. 지난 휴일에는 아들이 좋아하는 꼬막을 사다 양념장을 끼얹고 시금치와 콩나물을 무쳐 문 앞에 갖다 놨더니 거실 탁자에서 혼자 한 상 차려놓고 먹는 사진을 보내온다. 어느 날은 치킨이 먹고 싶다기에 퇴근길에 사다 주면 다시 인증 사진을 보내온다. 처음엔 지루하고 막막하여 2주가 언제 지날까 싶어 손으로 꼽으며 지냈다. 그것도 잠시였고 언니네선 언니가 워낙 음식을 잘해서 앉아서 얻어먹고 아침이면 도시락도 싸주고 원두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넣어주니 마치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같이 편안하다. 이젠 이 편안함에 익숙해져서 집에 가서 다시 주부 역할을 하며 그동안 세 식구였는데 아들까지 네 식구 식사 준비며 빨래와 청소까지 하려면 게을러진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데 몸이 뒤뚱하다. 잘 먹은 탓에 아닌 게 아니라 몸도 포슬 하니 살이 올랐다. 아들은 투표하는 날까지 자가격리일이라 이젠 한시름 놨다. 딸과 남편은 근무처에서 수시로 단속하는 문자가 오고 세 명 이상 모이는 자리는 가지 말고 목욕탕도 가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 격리 해제가 지났지만 이번 주말까지 언니네서 머물기로 했다.

 

언니는 어제저녁부터 살림 내주는 딸에게 하듯이 새 김치를 해서 주겠다 하고 안방까지 빼앗긴 처지에 딸이 차지한 방 하나에는 딸이 영원히 살아도 좋다고 한다. 아들만 둘을 키운 형부는 딸이 종알종알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아직도 신기하다며 눈가 주름이 부챗살처럼 접히도록 미소 띤 얼굴로 계신다. 옆에 언니가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아들은 비록 뜻한 바를 다 못 이루고 돌아왔지만, 건강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고 감사하다.

 

아들이 돌아오기 전 두 번이나 비행기가 취소되고 날짜가 뒤로 밀렸다. 세 번째 티켓 예매로 겨우 네덜란드를 경유하여 무사히 귀국하였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너른 집에 혼자 지내면서도 오히려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좋아하는 것도 다행이다. 워낙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라 그것도 감사하다. 시차 적응도 하루 만에 하더니 오일째부터는 나태해진다고 아침이면 잠옷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생활한단다. 열흘째 되는 날 베란다에서 얼굴을 보니 작년 가는 날부터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가 깡총하게 뒤로 묶였다.

 

4월 1일 우리 동네 벚나무는 봉오리 맺혀 하나둘 꽃이 피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강한 바람에 눈 내리 듯 펄펄 떨어지더니 도로변에 꽃잎만 바람에 밀려 폭신하게 쌓였다. 이젠 잎까지 뾰족하게 내밀고 꽃 떨어진 수술 몇 개 꽃인 양 불그레하게 달렸다. 아들에게 벚꽃 사진을 보내다 지웠다. 대신 날마다 하는 인사로 먹고 싶은 게 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문자로 묻고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을 부지런히 사다 나르는 자가격리 기간 동안 올봄의 벚꽃은 그렇게 피고 졌다. 

내일이면 18일 째라 집으로 가 대청소를 하고 한 며칠은 더 아들과 밥을 같이 먹지 않을 것이며 화장실도 혼자 쓰게 하고 우린 한 집에서 두 살림을 할 작정이다. 17일을 참고 있는데 며칠쯤이야! 우린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가 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 하나면서 여럿임을 배운 4월을 보내고 있다.

 

 

 

 

아들은 위에서 누나 사진을 찍고, 딸은 아래서 아들 사진을 찍었다. 누나랍시고 애틋함이 엄마인 나보다 훨씬 더하다.

 

 

 

아파트 진입로 양 옆으로 위의 사진처럼 세 개의 화분이 한 세트로 수십 개를 진열해뒀다. 오래간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꽃이 즐비하여 기분이 새로웠으나 약간 낯선 감도 있었다. 휴일 이틀간 열심히 대청소를 하고 월요일 오늘은 집에서 출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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