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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 영화, 공연)

피아니스트의 전설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20. 2. 25.


트럼펫 연주자 맥스 투니가 악기점에서 14달러에 트럼펫을 파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맥스가 분신 같은 트럼펫을 팔고 나오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연주하게 해달라고 하자 악기점 사장이 귀찮아하면서도 내준다. 그가 트럼펫으로 연주한 곡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뿐이다. 그 곡을 들은 악기점 사장은 오래된 레코드 판을 꺼내고 이 곡에 대해 묻는다. 맥스는 레코드 판이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건지 물으며 버지니아호에서 일을 얘기한다. 이 영화는 맥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악기점 사장은 맥스가 지어낸 이야기라며 반신반의하지만 그의 얘기를 듣는다.


거대한 버지니아호에서 연주자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맥스가 달려갔지만 이미 연주자는 다 뽑은 상태다. 그곳에서 트럼펫을 연주하자 그의 실력에 놀라 합격점을 주고 맥스는 승선한다.

버지니아호가 유럽에서 아메리카까지 닿는 동안 배의 맨 아래에선 석탄을 밀어 넣으며 배가 운항하게 하는 하층민의 노동이 가득하고 위험하다. 배 위에는 부르주아들의 파티가 열리고 일부는 망망대해를 지나며 아메리카 미지의 땅에 대한 기대에 들떠있다. 배 아래 흑인 노동이 주를 이루고 배 위엔 백인들의 여유로운 시간이 대비된다. 흑인 노동자 데니는 백인들의 파티가 끝난 자리에 떨어진 것이 없나 하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온갖 쓰레기 속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다가 피아노 위에 남겨진 백인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가 담긴 요람에 TD. Lemon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데니는 그 글의 T.D란 뜻은 땡큐 데니란 뜻이라며 사랑스러운 백인 아이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한다.

그는 동료들의 만류와 야유가 빗발쳐도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며 TD란 귀족이나 부자들의 이름에 들어가는 글이라며 아이 이름을 '데니 부드맨 TD 레몬'이라고 짓는다. 거기에 20세기가 시작되는 날에 발견되었으므로 나인틴 헌드레드를 붙여 아이 이름은 '데니 부드맨 TD레몬 나인틴 헌드레드(1900)' 긴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데니의 사랑을 받으며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나인틴 헌드레드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데니는 석탄을 퍼나르던 배 아래서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버지니아호에서 태어나 버지니아호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맥스와 친하게 된 계기는 맥스가 연주자로 배에 올랐으나 뱃멀미가 심해 구토를 하던 중 나인틴 헌드레드가 뱃멀미를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텅 빈 연회장 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자신이 피아노를 치며 흔들리는 대로 연회장을 빙빙 돌면서 피아노 의자에 맥스를 앉게 한다. 흔들림에도 꼿꼿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세상의 파도에 동요하거나 경거망동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과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결코 욕심을 내지 않는 현자의 모습을 나인틴 헌드레드를 통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은유로 보인다.

88개의 건반을 이용한 천재적인 연주를 하면서도 만족한 나인틴 헌드레드의 삶, 누군가 아이를 낳고 아메리카에 도착하곤 아이의 신분에 대해 또는 자신의 꿈을 위해 버려진 자신을 원망하거나 삶을 후회하는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버지니아호에서 88개의 건반에 충실한 삶. 인간은 드넓은 대지를 누비고 살면서 과한 욕심을 부린다. 이 글을 쓴 원작자와 연출자는 지상에 커다란 메시지를 던진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육지라는 건반을 연주하기에 너무 두렵고 힘든 곳으로 비친다. 버지니아호를 결코 떠날 필요도 없거니와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숱한 설득에도 육지에 한 발자국 내디뎌 보지 않은 나인텐 헌드레드의 때 묻지 않은 영혼. 피아니스트로서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다지만 욕심이 없다. 그저 주어진 길에 충실할 뿐......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태어나고 존재한다는 기록이 없는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가 낡아 폭파하는 날까지 낡은 배에서 살고 있다. 맥스는 나인틴 헌드레드를 잘 알고 있어 폭파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없는 돈을 구해 찔러주면서 악기점에서 빌린 축음기와 낡은 레코드판을 들고 버지니아호의 녹슬고 물이 차오르는 배의 아래부터 위로 오르며 나인틴 헌드레드의 피아노 연주곡을 틀어 놓는다. 맥스의 진한 우정은 눈물겹다. 나인틴 헌드레드를 찾아 육지로 데려오려는 맥스의 마음이 화면에 가득하다. 선실 계단 아래 그늘지고 구석진 곳에서 나인틴 헌드레드를 발견한 맥스, 둘은 그렇게 오래도록 얘기를 하고 맥스의 설득은 나인틴 헌드레드의 말에 무너진다. 그는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거대한 육지로 갈 엄두도 없거니와 버지니아호에서 태어나 버지니아호와 함께 사라질 운명임을 어필한다. 영화를 보며 고개 끄덕여지며 강제로 끌어내려도 소용없음을, 나 였어도 그를 거기에 두고 나왔음을 인정하게 된다.

 

딱 한 번 버지니아호를 벗어날 기회가 있었지만 트랩을 중간 즈음 내려가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다시 버지니아호에 오른다. 천재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는 여섯 살에 연회장에서 홀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사람들은 천재적인 연주에 감탄하고 그때부터 나인틴 헌드레드의 연주가 시작된다. 한 번 들으면 그대로 연주하는 절대 음감은 당연하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즉흥적으로 분위기를 묘사하며 그에 맞춤형 연주를 한다. 그의 연주가 세상에 소문을 뿌리자 재즈의 선구자격인 제리 롤 모튼 피아니스트가 도전장을 내밀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는 연주는 연주로 즐기자는 마음으로 도전을 받지 않는다. 도전하는 모튼의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끝내 그와 대결하자는 제리 롤 모튼과 둘러싸인 사람들을 위해 맥스가 자신에게 돈을 걸었다는 이유도 조금은 있었는지 세 번째 곡에서 강렬하고 빠른 음악을 선보인다. 기립박수와 헹가레가 처지고 그의 승리가 됐다. 배에서 내리지 않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연주를 녹음하고자 사람들이 오고 그가 연주한다. 연주 후 레코드판을 통해 들리는 연주를 듣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레코드판을 부수며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순간만이 연주일 뿐이라고 한다. 악기점 사장이 가지고 있던 부서진 레코드판을 겨우 붙였다는 그 레코드판이 바로 그 레코드판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렇게 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너른 바다 푸른 물결 위의 퍼렇고 누런 녹이 가득하고, 유리가 깨지고, 선실을 오가는 문들이 멋대로 꺾여 있고, 침대는 다리를 부러뜨린 채 사방 흩어진 그곳에서, 난간은 살짝만 기울여도 기다렸다는 듯 폭 주저앉을 그곳에서, 네모난 다이너마이트가  신호를 기다리는 그곳에서, 배 바닥은 점점 물이 차오르는 그곳에서, 자신의 한 생을 낱낱이 알고 있는 버지니아호에서, 피아노가 없으나 피아노를 상상하며 허공에 두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렇게 황금빛 불길 속에서 산화한다.


맥스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악기점 사장에게 빌려갔던 축음기와 레코드판을 돌려주고 나온다. 악기점 사장은 맥스에게 트럼펫을 돌려주며 이야깃값으로 충분하다고 돈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영화다.

주인공 팀 로스가 출연한 '저수지의 개들' 이라는 영화를 봐야겠다.


딸과 함께 본 영화 (2020. 02. 24)

 The legend of 1900.

 원작; 노비첸토(이탈리아 작가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