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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1200번 기사님께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9. 4. 24.


기사님 안녕하세요!

죄송하단 말씀 먼저 드려야겠네요.

죄송합니다.

4월 13일 창현초등학교 앞에서 버스 탔던 아줌마입니다.

그날 남양주 평생교육원에 공부하러 간다고 휴일이지만 좀 이른 시간에 버스를 탔지요.

첫 손님으로 탄 저는 내리기 쉽게 기사님 왼쪽 조수석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좌석 버스는 문이 하나라 내릴 때 당황하기 싫어 습관처럼 앞자리를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나만 태우고 출발한 차는 사거리를 지나 송라중학교 앞에서 잠시 신호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때 창밖에 흐드러진 벚꽃이 낮은 바람에도 슬슬 떨어지고 있었지요.

신호대기가 조금 길어서 휴대 전화를 꺼내 슬그머니 창에 대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참 고운 아침이었습니다. 해는 버스 뒤쪽에서 조금씩 비춰주었고요.

거리가 한가해서 휴일이라 늦잠 자는 사람이 많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한가한 거리에 바삐 걷는 몇 사람은 저처럼 일정이 있는 모양이고요. 가게 문을 열고 청소하는 사람도 보였어요.

읍사무소를 지나 꽃집 앞을 지날 때는 그쪽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얼마 전 엄마 사십구재에 가려고 거기서 꽃을 샀기에 저도 무심결에 그쪽으로 고개 돌리고 봤습니다.

두어 정거장을 지나자 칠순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와 딸로 보이는 쉰 줄의 여인이 버스를 탔습니다.

오르자마자 둘은 기사님 뒤에 어머니를 앉게 하고는 카드를 찍고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때까지는 그저 덤덤했습니다.

차가 읍내를 벗어나며 왕복 6차선 도로로 합류할 즈음 딸이 후다닥 일어나 제 뒤쪽 세 번째 자리로 가서

앉더라고요. 차는 달리는데 엄마에게 뒤로 가자면서 혼자 냅다 가서 앉아서는

"엄마 일로 와!"라고 서너 번 외쳤습니다.

거기 불편하다고 이리 오라고 하니 어떤 엄마가 딸의 말을 안 듣겠어요?

엄마는 굼뜨게 엉덩이를 떼다 차의 흔들림에 주춤거렸습니다.

기사님이 "차가 서면 가세요!"라고 하시면서 중재를 하셨지요. 저는 괜히 마음이 조마 했습니다.

기사님 뒷자리는 바퀴가 아래에 있어서인지 불룩하게 튀어나와 창 쪽에 앉으면 발을 올리고 갈 수 있지만

통로 쪽에 앉으면 반은 창 쪽과 함께 불룩한 곳이고 반은 쑥 내려가 있어 키가 큰 사람이 아닌 경우엔

발 두쪽을 불룩한 곳에 얹기도 불편하고 둘 다 내리기도 불편하거든요. 게다가 보통 아줌마들은 키가 그리

크지 않아 대부분 다리를 덜렁거리며 앉아 있어야 하고요.

그러다 보니 딸은 냅다 자리를 옮긴 거지요.

조심스레 차가 정차한 후에 엄마 손을 잡고 불편하니까 뒤로 가자고 했더라면 제가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인데

괜히 남의 엄마가 신경 쓰였습니다. 혹시나 큰 덩치로 넘어지실까 염려도 되었고요.

친절한 기사님이 버스 정거장에서  손님이 타지도 않았는데 잠시 세워서 뒤로 가시라고 배려를 해주셨지요.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한 것은.

괜히 눈물이 자꾸 났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멈추려고 저도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다른 생각을 해야지 하면서 집 생각 친구 생각 멀리 보이는 천마산의 산벚꽃을 보며 예쁘다고

나무들이 파래지고 있다고 하늘이 푸르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봇물 터지듯 자꾸만 흐르더라고요. 슬금슬금 거리고 닦다가 나중엔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양쪽 눈에 대고 그쳐야지 하며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럴수록 눈물은 더 흐르고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참 주책이지요?

좀 전에 창밖을 보며 사진을 찍더니 그새 울고 앉았으니 조울증 환자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우는 척하려고 코를 훌쩍이고 잔기침도 하고 그랬지만 그게 가려지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괜찮은 척 밖을 보는데 그곳엔 유황천 사우나가 있고 모녀가 목욕 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뿔싸! 밖을 왜 보았는지 후회가 되었습니다.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고개가 숙어지더군요.

버스 정면 대로변만 보고 갈 걸 귀를 막고 갈 걸~

손수건이 축축해졌습니다. 엄마 돌아가시고 가끔 눈물 흘렸지만 이렇게 많이 운 적은 또 없었습니다.

남양주 제2청사를 한 정거장 앞두고 이제 부끄러워 어떻게 내릴까 걱정되더라고요.

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인사하는데 코맹맹이가 되어 인사도 못 할뿐더러

아침부터 버스에서 여자가 울었으니 재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아 너무 죄송했어요.

그저 벨을 누르고 조용히 내렸습니다만 뒤통수가 따가웠습니다.

기사님! 아침부터 버스에서 질질 짜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날 기사님 안전에 아무 문제가 없으셨기를 바랍니다.

저는 제 감정이 뭔지 잘 모른 채로 그저 눈물이 그렇게 나던데 왜일까 생각해보니 불효한 것 때문도

엄마가 보고 싶은 것도 아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무친다' 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무치도록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기사님! 앞으로도 매주 토요일이면 그 시간에 1200번을 타야 하는데 혹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기사님 얼굴을 몰라 직접 사과는 못 드리겠고 이렇게 마음 전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맨 앞자리가 아닌 최소한 두 번 째나 세 번 째 자리에 앉겠습니다!

운전하시는 그날까지 안전운행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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