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은 퇴근 무렵에도 정수리에 앉아 뜨겁게 안아준다.
그늘에 들어서면 썰렁해서 반소매 아래 나온 팔을 양손으로 어긋나게 슬그머니 안게 된다.
'그래, 오늘도 일 없는 사무실에서 시간 보내느라 지루했지? 이제 집에 가면 일거리 넘칠 거야!'
회사에 가면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일이라 수월해서인지 출근길은 여유롭고 편안한 마음인데 집으로 퇴근하는 길은 오히려 집안일을 해야 하니 나도 모르게 마음가짐이 이리된다. 엄마로 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솜씨가 있든 없든 반찬을 만들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다림질도 해야 한다.
종점이라 기사가 버스 밖에서 나른함과 함께 귀찮은 표정을 짓고 섰다. 묻지도 않는 말을 건네고 버스에 탄다.
"버스 타고 있을게요!"
그냥 무작정 타도된다만, 매번 지체할 겨를도 없이 행동보다 말이 먼저 나와 버린다. 비어있는 버스에 첫 손님으로 타고 앉아 출발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버스는 날마다 마주치는 한 여인과 나를 태우고 시내로 향한다. 다섯 정거장만 가면 그 여인은 내린다. 나는 그곳에서 제법 더 시내 분위기가 나는 곳으로 한 정거장 더 가야 한다.
초여름 어느 날 주변에 나눠줄 심산으로 상추를 많이 따 들고 버스를 탔다. 상추 필요하면 가져가시라고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 여인은 자식들이 이미 출가해서 부부만 있으니 조금만 달라 했다. 조금만 달라는 그 여인에게 보따리 장사처럼 주섬주섬 도시락 쌌던 비닐봉지를 벗겨 가득 담아줬다. 이후로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를 나눈다. 몇 개월이 지나 이젠 날씨 얘기까지 할 정도가 됐다.
그 여인이 다섯 번째 정거장에서 뒷문으로 내리자 뒤늦게 앞문이 열렸다. 할머니 한 분이 찬찬히 버스에 오른다.
하얀 반투명 비닐봉지가 허리춤에서 출렁인다. 운전석 뒤로 세 번째 칸에 봉지를 내려놓고 버스가 신호에 정차되자 버스비를 가져다 요금함에 집어넣고 자리로 돌아와 앉으셨다. 곧이어 비닐봉지를 주섬주섬 들어 무릎에 올린다. 가만보니 박카스가 한 상자는 안 되겠고 대여섯 병은 됨직하다. 부스럭대며 한 병을 꺼내더니 운전석으로 가서 기사에게 건넨다.
순간 놀랐다. 그러면서 찡했다.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엄마'라는 말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엄마시니까 아들처럼 보였을까? 해가 유난히 쨍한 이런 날 종일 운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이 되었나 보다. 엄마의 손길로 여겨졌는지 기사가 선뜻 "고맙습니다" 하며 받는다.
고마움 뿐만 아니라 정겨움이 가득 담겼음을 높은 톤으로 답하는 기사가 믿음직스럽다. 휑한 버스 안을 가을날 오후 햇살이 따끈하게 데워놓은 데다 더 따뜻한 마음이 보태졌다. 나도 모르게 낯선 엄마의 입성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우리 엄마를 그리워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 신발을 신으셨다. 참 곱기도 하지! 플라스틱 신발은 구정 뜨개실로 짠 무늬 형태로 만들어졌다. 요즘은 참 기술도 좋구나 하며 자세히 살폈다.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신발은 230mm쯤 되어보였다. 보라색 신발 위로 양말까지 유심히 보았다. 연분홍 양말이 가지런하고 얇은 다리가 우리 집 행운목을 닮았다. 넉넉한 바지는 검정색 바탕에 큼직한 패랭이가 푸르딩딩하게 피어있어 왠지 서글펐다. 이왕이면 더 고운 색으로 피어 있으면 좋을 성싶었다. 윗옷은 다행히 짙은 분홍의 블라우스에 커다란 페이즐리 문양이 어지러이 그려져 있었지만 고왔다.
짧은 파마머리에 꼭 다문 입술을 하고 어디를 가시기에 박카스 몇 병을 들고 가방도 없이 버스를 타셨을까? 칠순은 훌쩍 넘어보이는 낯선 엄마의 옆얼굴에 노을 같은 검버섯이 피었다.
만약 우리 엄마라면 이 시간 어디로 가고 계셨을까? 문득 엄마를 뵈러 가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오랫동안 가지 못했음이 죄스럽다. 세상의 모든 기억을 버리고 이 세상 처음 왔을 때처럼 다 잊고 저 세상으로 가실 준비를 오래도록 하고 계신다. 그렇다 해도 자식을 낳았음은 본능적으로 알고 계시리라.
엄마에게 너무 오랫동안 얼굴을 보여드리지 못한 자신이 불효막심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기울어지는 해를 보며 나도 서쪽 하늘로 열심히 가고 있지만, 엄마는 서산을 막 넘으려 하는 중이라 눈이 부시고 힘에 겨우시겠구나 싶어 쓸쓸한 마음이다.
낯선 엄마는 달랑 비닐봉지 하나와 주머니 속 천 원짜리 몇 장에 의지한 채로 목적지까지 잘 가셨으리라.
* 며칠 전부터 사진 전송이 되질 않아 낑낑대다 글만 이렇게 올려 봅니다. 밋밋한 페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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