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일찌감치 일어나 가족들 먼저 출근시키고 7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봄날이라 해도 바람이 불어 가볍게 나서면 감기 걸리기 딱 좋을 날씨다. 고려하여 아침이면 조금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을지 따뜻한 옷을 안에 입고 겉옷을 봄날에 맞춰야 할지 약간의 망설임이 있는 날이다. 화사한 벚꽃 아래 우중충한 색으로 입고 나서긴 왠지 벚꽃에 폐를 끼치는 마음이 든다. 옷장을 아무리 열어봐도 화사한 옷은 눈에 띄지 않고 밝은 옷도 없다. 바지는 검은색, 남색, 밤색, 하얀색, 이 외의 것은 넷째 언니가 작다고 보내준 짙은 자주색의 유럽 여행 때 입은 것과 카키색의 옆에 검은 선이 들어간 얇은데 기모가 들어간 바지가 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색깔별로 많기도 하다.
평소 유행에 민감하거나 세련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저 아무거나 입고 너무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도 않게 되도록 튀지 않게 평범하게 입고 그렇게 남들 속에 묻어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윗옷은 편안하게 입는 걸 즐기는 편이라 티셔츠가 주를 이루고 겨울용은 대부분 목을 덮는 길이다. 봄옷에 도전하자니 일단 목을 훤히 드러내야 하는데 블라우스 입을 용기가 아직 생기지 않는다. 이른 아침 시간에는 바람과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골짜기로 출근하기에 그다지 옷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라 겨울에는 두꺼운 바지에 두꺼운 티를 입고 패딩만 걸치면 되었다. 털이 숭숭 달린 부츠를 신고 장갑을 끼고 가방은 등에다 메고 모자까지 뒤집어쓰면 그만이었고 더러 목도리를 휘감아 완전무장을 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날이 환해지니 작년에 뭘 입었더라 하면서 장롱을 열고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보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더 훑어본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쳐다봐도 손에 잡히는 것은 늘 그게 그거다. 편하고 무난하고 더럽지 않은 옷이면 그만이니까! 오늘 남양주의 아침은 조금 쌀쌀한 기온이라 짙은 자주색의 바지를 입고 윗옷을 넷째 언니가 또 작다며 보내준 검고 얇으면서 몸에 착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었다. 나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티셔츠 앞면에 전체적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큐빅으로 장식이 돼 있었다. 입고 보니 바지와는 색이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어색하여 다른 티셔츠를 찾았다. 아무래도 밝은색이 나을 것 같아 베이지에 소매 끝과 아래쪽으로 바지 색과 비슷한 자주색이 들어간 티로 갈아입고 검고 부드러운 울 소재의 내가 좋아하는 엉덩이 덮이는 긴 겉옷을 입었다. 나서려니 또 어째 티셔츠가 길지 않아 연한 비단 스카프로 배를 가리고 길게 늘어뜨리면 되겠지 하다 다시 망설였다.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고 걸으면 스카프는 자꾸 양다리 사이로 휘감긴다는 게 떠올라 불편할 것 같았다. 겉옷의 품이 넉넉한 소재가 아니라 지퍼를 다 잠그고 입으면 여기가 촌이지만 너무 촌스럽기도 하겠고 보는 사람들도 시커멓고 답답해 보일 것 같았다.
어쩌자고 나는 봄날 아침 하지 않던 짓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나 하고 시각을 봤다. 이제 더 지체하다간 버스를 놓칠 것이다. 우리 읍내만 도는 두 대의 버스이기 때문에 전화 속 버스 정보를 쳐다보며 롯데마트를 지나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좀 전에 입었던 겉옷을 벗어 걸어놓고 베이지색 겉옷이 낫겠다 싶어 후다닥 갈아입었다. 황급히 딸이 사 준 비단 스카프를 두르고 나섰다. 현관에서 밤색 워커를 신으며 허둥지둥 든 생각이 또 있었다. 그래도 4월인데 신발도 가벼운 거로 바꿔야겠다고. 하지만 오늘은 워커를 신고 타박타박 걸었다. 검은색 워커가 아니라 좀 낫다며 스스로 위안을 했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서자 집 앞 목련은 이제야 벙글어지기 시작해 눈앞이 환했다. 종종걸음을 걸으며 활짝 핀 벚꽃 한 번 쳐다보고 손전화 속 버스 정보 한 번 보며 걸었다. 아파트 화단 가에 늘어선 사철나무의 초록 잎을 보니 싱그럽고 고와서 무심한 듯 슬쩍 왼손으로 쓰다듬으니 손에서 몸으로 초록 물이 드는 느낌이다. 봄이 나를 이렇게 만들고 있구나! 변화란 별거 아니구나! 밝아지는 주변만큼 나도 밝아지고 싶구나! 내가 환하게 웃으면 나를 보는 누군가도 밝아지려 하겠구나! 내가 시무룩하면 주변 사람들도 시무룩하듯이 내가 밝아야 주변이 밝겠구나! 환하게 밝게 웃으며 오늘도 살아야겠구나! 별것도 아닌 다짐 같은 것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자주색 바지가 괜히 마음에 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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