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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내 친구 은교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4. 11. 17.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고 시절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내 친구 은교는 1학년 때 친구였는지

2학년 때 친구였는지 지금도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래저래 나는 은교에게 미안함만 가득한데 하나 더 보태진 셈이다.

산골짝에서 태어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 닿는 거리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그야말로 병풍으로 둘러쳐진 듯 산으로 가려진 곳이 고향이다.

중학교는 면 소재지가 있는 동네로 다녔고 고등학교는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가

군청이 있는 곳으로 다니게 되었는데 다니던 중에 군이 시로 승격을 하게 되었다.

 

그곳.

여고생이 되어 시를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면 단위의 각기 다른 중학교를 나와

낯선 시작을 하였던 우리는 새로운 친구 사귀기에 바빴고

가만있어도 말 걸어 주는 친구가 있었고 때론 찾아다니기도 했던

그날의 설렘은 지금 생각해도 들뜨고 즐거운 날들이었다.

 

여고생이 되어 서먹서먹하게 자리를 지키던 우리 중에 왈가닥이던 은예는 먼저 말을 건네고

친구 하자며 다가왔고다. 이래저래 주변에 끊임없이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 놓고 깔깔거리기 바빴던 그 날들.

결국 다달이 치렀던 시험성적이  점점 내려가자 담임선생님은 따로 불러서

입학할 때 성적과는 아주 다르게 내려가는 성적에 대해 야단을 치셨고 그때부터 조금씩

정신 차리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사진은 우향님 과수원에서 찍어 보내주신 무화과입니다)

그때.

 늘 친구가 많아 깔깔 웃기 잘하고 명랑 소녀였던 나와는 달리 은교는 얌전한 친구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였다.

어느 여름날, 주변을 맴돌던 은교가  내 손을 잡고는 할 말이 있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매점 앞 등나무 아래 벤치에는 등꽃 향기가 가득하고 초록 잎들은 시원함을 내뿜고 있었다.

은교는 까만 교복 치마 옆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꺼내 가만히 내 손바닥에 올려줬다.

나는 무화과란 성경책에서만 존재하는 열매라고 알고 있었을 뿐 그때까지 직접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과일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있었다.

은교가 손바닥에 올려 준 그 열매가 무화과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자그마한 열매가 보랏빛을 띠면서 속살엔

작은 씨앗이 가득한 무화과는 맞춤하게 잘 익은 것이었다.

놀라고 신기함에 들여다 보며 입안 가득 퍼지는 달곰함을 최대한 느끼며 오물거렸다.

그 달곰함이라니! 그 신비로운 맛이라니!  세상에서 처음 느낀 맛이었다.

그렇게 은교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아침이면 무화과를 따서 주머니에 넣고 친구들 몰래 불러내어

열매를 건네주며 나와 조금씩 친해졌다.

 

참 나쁜 나는 다디단 무화과 열매와 함께 찾아온 은교와는 길게 우정을 이어가지 못하고

무화과 열매가 다 떨어진 후 얼마간의 대화와 몇 번의 웃음과 몇 번의 눈 맞춤 이후

은교의 나와 친해지고 싶어 했던 마음은 까맣게 모른 체 무화과의 달콤함을 삼킨 뒤로 자연스레 멀어졌다.

이미 친한 친구들에 둘러싸여 몇 걸을 뒤에서 손짓하는 은교와 따로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변명하자면 나는 인기 있는 여고생이었다.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은교와 나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2학년 때 서로 다른 반이 되어

졸업할 때까지 두어 번 마주친 기억밖에 없는데 특별히 요즘 말하는 베스트프렌드가

되지도 않았고 졸업 후엔 자연스럽게 잊혔다.

 

졸업 후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은교가 살았던 동네를 지나면서 비로소 은교에게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던 자신을 알게 되어 수소문하였지만 은교의 연락처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은교는 이기적인 나를 친구로 상대하기 싫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 후회를 참 많이 하면서 살다가 잊기도 하고 가끔 시골 갈 때는

은교 생각을 하고 그랬다.

살면서 차차 잊혔는데 몇 년 전 은교 영화가 나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내 친구였던 은교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고 미안한 생각만 가득했다.

무화과 열매를 사진으로 보면서 다시 은교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고 다시 만나거나 연락이 된다면

그때의 미안함을 꼭 전하고 싶다

 

"은교야! 그땐 정말 내가 생각 없이 살았던 거 같아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무화과를 처음 알게 해 준 너였는데 그 감사함을 그리고 친구가 되자는 간접적인

그 말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다른 친구들과 휩싸여 등한시했던 내가 정말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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