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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보석상자

노란 더위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4. 8. 12.

그때 더위는 늘 노란색이었다.

노란 햇살이 흙길 위에 내리쬐던 여름날의 노란 더위!

그 후로 줄곧 더위를 떠올리면 노란빛이 먼저 떠올랐다.

 

뒷마당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번갈아 가며 도리깨질을 하였고

곡식을 널어놓고 뒤적거렸던 기억이 가물가물 난다.

 

노란 더위가 노란 길 위에서 춤을 출 때.

보리였는지 나락이었는지 한 됫박을 자루에 넣어서 작은 팔 안에

안겨주셨던 아버지의 얼굴도 노랬다.

보현 1동에서 보현 3동까지 자루를 꼭 끌어안고 오르던 그 길에선

늘 노란색만 생각하며 걸었다.

아마 콧잔등에 방울방울 맺히던 땀방울도 노란색이었으리라.

 

노란 병아리, 노란 개나리, 노란 색종이, 노란 해바라기, 노랗고 냄새나는 애기똥풀꽃,

남들이 빨간색이라 하는 태양도 내 눈엔 딱 노란색이었다. 

대낮에 줄기차게 노랑을 새기며 걸어 올라

노란 깃발이 꽂힌 보현 3동 재윤이네 너른 복숭아밭 입구에 닿으면

나는 노란 침을 흘렸다.

 

가져간 자루를 내밀고 그 자루 가득 잘 익은 복숭아를 안고 다시 노란 길을 따라

보현 1동 우리 집까지 내달을 때면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에 노란 더위마저

잊게 되었다.

재윤이 아버지는 재윤이 친구라며 복숭아를 많이 담아 주셨고

재윤이 고모는 친구 동생이라며 많이 담아 주셨는데 재윤이는 얼굴이

복숭아처럼 달아올라 허둥거렸고. 나는 새초롬히 노란 땅바닥을

발로 북북 문지르며 노란 더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먹거리가 없었던 어린 날의 여름은 복숭아가 많아서 좋았다.

우리 집까지 돌아온 나는 온몸에 묻은 복숭아털을 노란 길에 폴폴 털어대며

봇도랑에 앉아 복숭아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봇도랑 물 위에 떠내려가던 하얀 복숭아털들도 노란 물 위에서

빛을 내며 빙글 춤을 추던 여름이었다.

 

 

노란 더위는 어느 날 도로가 포장되면서 서서히 색이 바래었고

복숭아를 씻던 노란 봇도랑도 복개가 되어 없어져 버렸다.

노란 더위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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