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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보석상자

오늘은 아버지가 몹시 그리운 날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4. 7. 21.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늘 낡은 국어책 속의 삽화처럼 흑백으로 드문드문 떠오르는데 언제가 최초인지는

모른다. 한겨울밤 친구들과 놀다가 느지막이 오셔서 잠자는 딸들을 깨우고 저고리 속에 숨겨 온 단팥빵 찾기를

즐기시던 모습과 밥상앞에 마주 앉은 어린 막내딸을 위해 하얀 쌀밥을 삼 분의 일 정도 남겨주시던 모습.

 또 길갓집인 우리 집 큰 방문을 열어놓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계시며 무심한 듯 지켜주시던 모습.

 

 아무 보탬이 되지 않던 나만 남겨두고 농사철에는 온 가족이 논밭으로 나가거나 당시 우리 집의 수입원이던

창호지 공장으로 나가셨다. 혼자 까만 비누를 들고 집 앞 도랑에 앉아서 종일 걸레를 빨며 물놀이를 하고 있으면  

비누가 다 닳아질 무렵에야 지게에 눈보다도 새하얀 문종이를 지고 오시거나 콩대나 참깨 단을 가득 지고 느티나무

앞으로 걸어오시던 모습.

 "아버지"하며 달려가던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안도하는 눈길과 빙그레 웃으시던 그 모습.

 어디가 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추억이고 기억인지 퍼즐 조각처럼 이리저리 맞춰봐도 잘 맞춰지지 않는다.

겨울밤이었는지 밥상 앞이었는지 지게를 지고 오시던 모습인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들은 막내인 나를 아직도 가끔 울린다.

 큰언니가 일찌감치 외삼촌을 따라 서울로 와서 그 시절엔 드물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에

취직을 하였고 작은 오빠도 서울로 와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두 자식을 보기 위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가끔 서울 나들이를 하셨다. 서울까지 버스를 대여섯 번

갈아 타야 하고 새벽같이 나서서 서울 도착까지 7시간 이상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오가는 길엔 휴게소에 들렀다가 차 번호를 잊어버렸다며 마흔다섯에 낳은 손녀 같은 막내딸에게

버스를 찾는 시늉을 하시며 소소한 장난도 일삼으셨다. 의기양양하게 "차 번호 1234예요"라며 내렸던 차를

금방 찾아내면 그 모습이 그렇게도 대견하셨던지 시골집에 도착해서는 여기저기 그 얘기를 하시곤 했다 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멀어서 자취하였고 토요일 반나절 수업이 끝나면 1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시골집으가면 2시쯤 되는데 항상 아버지는 큰 문을 열어젖히고 버스를 바라보고 계셨고 다음 날인 일요일

오후 6시 반쯤에 버스를 타고 다시 읍내로 나올 때도 똑같은 모습으로 버스를 바라보고 계셨다.

 

 당시에 우리 방에는 반신 거울이 없어서 탁상용 달력만 한 거울이 가장 컸는데 머리를 빗고 단장할 때는 늘 아버지

앞에서 빗어대며 "아버지, 내 이쁘지요?"를 묻고 또 물었다.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허허 웃으시다 마지 못해

"그래 참하다" 하셨다. 1학년 때는 단발머리라 쉽게 빗고 나왔지만 2학년 때는 갈래머리를 묶어야 했기에

아버지가 거울을 들고 계셔야만 가르마를 타고 머리를 묶을 수 있었다.

 

 그렇게 3학년이 되었을 때는 머리를 갈라서 땋아야 하기에 2학년 때보다 거울을 들고 계셔야 할 시간이 더 많아

졌고 까다로운 나는 조금만 가르마가 비뚤어지거나 양쪽 머리가 똑같지 않으면 다시 땋고 또 땋으며 아버지에게

한 손으로는 땋지 않은 머리를 잡고 계시라 하고 한 손으로는 거울을 들고 계시란 부탁을 했는데 그것조차도 팔이

아프셨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다. 아버지 역시 당연한 표정으로 투덜대는 내게 싫은 내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다 땋은 후에 또 한 번 "아버지 내 이뻐요?'"하고 물으면 아버지는 으레 귀찮다는 표정으로

"오냐! 참하다." 하셨다.

 표정과는 달리 아버지는 막내딸이 얼마나 예쁘게 보였을지 내 아이를 키워보니 조금은 알 듯하다. 


 그렇게 자췻집으로 갈 때면 버스 놓칠까 봐 나를 태워 갈 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들으시고는 차가 내려온다 싶

으면 얼른 나오라며 옆으로 치워뒀던 뽀얀 내 운동화를 신기 좋게 앞으로 내밀어 주셨다.

 나를 태운 버스가 집으로 향할 때나 읍내로 향할 때 아버지는 성냥갑만 하게 버스가 앞머리를 내밀며 시골 마을을

들어서는 순간과 구비를 두 번 휘돌아 저 멀리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고 계셨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미처 몰랐었다. 해가 가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누적되고 자주 보고 싶어진다!

 

 

 돌아가시던 날은 3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하루 전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에게 머리를 땋겠다며 거울을 들어 

달랬더니 아프다 시며 겨우 들어주시고는 앞마당으로 나가셔서 엄마가 곡식을 펼쳐 놓으신 멍석 한 귀퉁이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 갔다 올게요!"했는데 웃지를 않으시고 손을 휘휘 저으셔서 나는 재차 "아버지 왜 안 웃으세요?

갔다가 다음 주에 올게요!" 하고는 아버지의 어두운 표정을 못마땅해 하며 버스에 올랐다.

 

 아버지는 지병이 있으셨지만 늘 그 자리에 그렇게 계실 줄만 알았던 나는 다음 날 아침 자취방에서 곤로에 밥을

짓다 큰오빠의 동업자가 찾아와 빨리 병원으로 가자는데 어제의 아버지 모습과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을 애써

밀어내며 아니겠지, 괜찮으시겠지, 아직 돌아가신 건 아니니까 하며 꿈결인 듯 따라나섰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버지는 피를 양동이에 반도 넘게 쏟아 놓은 채 눈을 뜨고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모셔 온 후 안방에 눕혀드리고 큰 올케가 아버지 눈을 감겨드리라 해서 나는 전날의 아버지 모습을

생각하며 다시는 못 볼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렸다.

 아버지 얼굴에 덮인 천을 수시로 들어 올리며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자 그만 보라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서럽고 기가 막혀 자꾸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의 점점 부어가는 시커먼 얼굴을 보면서도 보고 싶다며

 꺽 서럽게 하도 울어대서 문상객들은 나를 보며 더 눈물을 쏟았다.

 

 아직 2학기가 남았는데 남은 학기 동안 누가 내 머리를 잡아 줄 것이며 거울은 또 누가 들어 줄지도 막막했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살아주시지! 하며 원망하며 울었다.

 난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좋다는 말을 달고 다녀서 엄마는 왜 아버지가 더 좋으냐며

서운함을 내보이셨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 한 번도 엄마가 아버지보다 더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난 참 어리석고 바보 같은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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