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상무사 기념관(이현숙)
-경북신문 '2024 경북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전' 입선-
봄이면 괜스레 몸이 근질거린다. 알 수 없는 설렘은 해마다 찾아온다. 누군가 뒤에서 자꾸만 떠미는 듯하고 밖에서 끌어내는 듯하다. 이럴 땐 집을 나서면 오히려 차분해진다. 선조들의 흔적을 좇아 고령으로 갔다. 봄날의 푸르름 속에 빠져드니 싱그럽고 해사하다.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하니 대가야 박물관과 역사관, 우륵박물관, 개실마을 등 가보고 싶은 곳이 죽 나온다. 유명하진 않아도 흥미로운 곳은 없나 싶어 블로그를 뒤적거렸다. 조선 시대 보부상에 관한 글과 사진이 나왔다. 여유로운 공간에 호젓하게 선 기와집이다. 수십 년 동안 경리 업무를 봤던 터라 우리나라 상업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솔깃해 첫 목적지를 고령 상무사 기념관으로 설정하고 찾아갔다.
건물 앞 오른쪽에 세워진 간판에는 ’고령 상무사‘라고 적혔다. 왼쪽에는 보부상에 관한 내용이 적힌 안내판이 세워졌다. 입구의 계단을 오르다 보니 점심시간을 알리는 안내판과 함께 대문에는 굵직한 자물쇠가 걸렸다. 하필 도착한 시간이 정오여서 맞은편 안내소도 비었다. 기다리기엔 시간이 아까워 5분 거리에 있는 대가야 박물관으로 갔다.
전시장을 두루 돌아보는데 한쪽에 조선 시대 고령 보부상 유품이 전시됐다. 상무사 기념관에 있을 거라는 예상을 뒤집고 궁금증을 풀어낼 유품이 한곳에 모여있다. 고령에서 상업을 담당해 온 단체로 보상은 봇짐장수, 부상은 등짐장수다. 전시관 벽면에 드로잉기법으로 부상을 그려놓은 앞에다 물금장 막대를 붙여놨다. 부상은 소금 가마니를 지고 벌떡 일어날 채비를 하는 중이다.
물금장 아래 오동나무로 깎아 만든 ’당각‘이라는 나팔이 길게 놓였다. 이 나팔은 나무로 만든 악기인데 금관악기라 적어놨다. 나무 안에 쇳조각을 붙여놨나 싶어 아래에 뚫린 구멍 속을 봐도 나무로 깎아 만든 나팔이 틀림없다. 나팔은 홍두깨처럼 긴 나무로 위에는 폭이 좁고 아래는 넓다. 중간에 두툼하게 잡을 수 있는 매듭 두 개가 있다. 보부상단을 불러 모을 때 나팔을 불었다는데 도대체 나팔소리가 얼마나 크길래 상인들이 듣고 모였는지 나팔을 한번 불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 앞에 고령상무사와 관련된 고문서와 선생안이란 책이 몇 권 전시됐다. 한문으로 적힌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안건을 묶어서 만든 책으로 보인다. 언뜻 외상값을 적는 장부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아니다. 누가 어떤 안건을 냈는지 기록된 귀한 문건인데 한문으로 적힌 글이라 속속들이 알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한 면쯤은 한글로 정리해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장 통에는 붉은 인주와 네모난 인장이 있고 옆에는 인장이 찍힌 종이가 있다. 문서를 작성한 단체나 담당자가 인장을 찍는다는 것은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체계가 잡혔다는 증거로 보인다. 지금도 관공서나 회사에서 문서를 작성하여 보내거나 받을 때면 문서의 끝부분에는 책임자나 단체의 직인을 찍는다. 이러한 유래가 시작된 곳이 이곳인가 싶어 전시된 유물을 살폈다. 네모난 직인을 찍을 때면 오탈자가 없는지 꼼꼼히 살피던 습관이 떠올라 붉게 찍히는 인장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수백 년 전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생활 속의 법칙과 원칙을 만들어 시행한 흔적이 반갑고도 놀랍다. 물건을 사거나 판매할 때는 적당한 이익을 남기고 같은 물건은 비슷한 가격을 매기며 서로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증거라 여겨진다. 떳떳한 판매와 수익을 위한 그들만의 체계가 얼마나 시대를 앞선 생각인지 고개 끄덕여진다.
어릴 적,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다니던 봇짐장수가 저녁이면 우리 집으로 와 잠을 잤다. 그 봇짐장수가 첩첩 산골 보현산 기슭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다른 물건은 기억에 없지만 꿀, 화장품, 옷, 세 가지는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봇짐장수는 살얼음이 얼 즈음이면 꿀을 팔러 다녔다. 우리 집은 방을 사이에 두고 가운데 마루가 있었는데 봇짐장수의 짐은 항상 마루에 두었다. 어느 해 겨울,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작은 오빠가 꿀 병의 뚜껑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본 오빠는 주둥이가 좁은 꿀 병이라 손가락이 잘 닿지 않자 기다란 막대를 가져다 꿀을 찍어 먹었다. 언니들과 나는 침을 흘리며 한 번만 달라고 매달렸다. 올망졸망 서너 명이 새처럼 돌아가며 받아먹던 꿀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여덟 살 즈음이었다. 봇짐장수가 뒷동네에서 머리에 이고 있던 커다란 보따리를 활짝 펼쳤다. 동네 아이들과 아줌마들이 왁자하게 덤벼들어 옷을 뒤적였다. 저마다 옷을 몸에다 대보고 맞을만한 옷을 챙겨 가격을 흥정하다가 마땅찮으면 다시 내려놨다. 누구는 곡식으로 값을 치르고 누구는 외상을 했다. 어른들 틈에서 기웃거리며 옷을 고르던 나는 오렌지색 스웨터와 밤색 바지를 골랐다. 옷을 들고 엄마를 졸랐으나 어림도 없었다.
나는 그길로 옷을 꼭 끌어안고 도망쳤다. 소리 지르며 좇아오는 엄마를 따돌리고 광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나는 어둑한 광에서 설핏 잠들었다가 나를 찾는 소리에 벌떡 깨어났다. 구겨진 옷을 안고 방문 앞에 선 나를 보곤 아버지는 웃으셨고 엄마는 화를 냈다. 언니가 넷인 나는 그날의 줄행랑으로 처음 새 옷을 가졌다.
봇짐장수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고 보니 등짐장수의 추억도 떠오른다. 지게에다 짐을 가득 싣고 지팡이를 짚으며 목청껏 소리 지르던 아저씨다. 아저씨가 나타나면 산골에는 비린내가 풍겼다. 소금에 절인 생선을 지고 다니던 아저씨는 부잣집에서 오래 머물렀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헐렁해진 지게를 당산나무 아래 받쳐놓고 동네 아저씨들에게 저잣거리의 소식을 들려줬다. 그때 먹었던 고등어와 갈치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조선 시대엔 양반가 여인이나 여염집 아낙들도 함부로 나다니며 물건을 사지 못했다. 별채에서, 사립에서 동동구리무를 주문하면 며칟날 몇 시쯤 오겠노라 약속한 날에 상인이 슬며시 다녀갔다. 선주문 후 배달의 시조가 보부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최초의 배달서비스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화장품이나 건강식품을 찾아다니며 판매하는 사람이 있으니 보부상의 맥은 아직도 진행형이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잠시 추억을 더듬으며 전시장을 서성이다가 박물관을 나왔다. 처음 목적지였던 고령 상무사 기념관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출입문의 자물쇠는 그대로 잠겨있다. 맞은편 안내소로 가니 원래 문은 열지 않는단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대가야 박물관에 있다는 말에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럼 기념관은 왜 있냐고 물었다. 매년 봄가을엔 우두머리인 반수와 집장의 맥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그 외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답이다.
일부러 찾아간 곳이라 그냥 돌아오기 서운해서 기념관의 왼쪽으로 돌아 담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한가로운 옛날 대갓집으로 보인다. 정면, 측면 디귿 자로 지어진 건물은 팔작지붕 같기도 하고 맞배지붕 같기도 하다. 마당에 거뭇해진 비석 일곱 기가 늘어섰다. 자물쇠 뒤 벌어진 틈새로 정면을 들여다보니 너른 흙 마당은 한가롭고 지붕 아래 현판 글씨는 예스럽다. 건물 앞에 세워진 보부상에 관한 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었다.
기념관은 조선 시대 고령지방의 상업을 담당해 온 보부상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고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오던 상인단체였으며 자신들만의 조직체계와 윤리규정을 만들어 장악했다는 내용이다. 상인들은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고자 법칙을 만들었다.
미리 박물관에서 살펴본 터라 건물만 봐도 미련이 없다. 고령 상무사 기념관 옆 고아리 고분에 올라 초록 짙은 고령을 눈에 담는다. 이곳만 보아도 고령의 매력에 빠지기에 충분하다. 다시 목적지를 향하여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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