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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착각의 향

by 향기로운 나무(제비꽃) 2017. 3. 23.

 요즘은 여자 기사분의 버스를 자주 타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니

내리기 전에 무심히 올려다본 곳에 기사 이름이 적혀있다.

 왠지 여자 기사분이 운행하는 날은 버스에서 고운 향이 나는 듯하다.

이경숙 씨가 끄는 버스에서 이현숙 씨가 내렸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속으로 숙이가 정말 흔하디흔한 시절이 있었지! 생각했다.


 사거리에서 건널목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데 삼삼오오 하굣길의 학생들이 봄꽃처럼 넘쳤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건널목 아래쪽은 중학생들이 넘쳤고, 위쪽에는 고등학생들이 넘쳤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 향내가 진하게 주위를 감쌌다.

 킁킁대며 향의 근원지를 눈으로 찾아 나섰다. 내 뒤에 초등학생 여자아이와 아이 엄마가 손을 잡고

속삭이며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동시에 샤프란 라벤더 향이 진하게 풍겼다.

 

 길을 건너 타박타박 걸으니 한 무리의 덩치 큰 여고생들이 도로가 좁을 정도로 밀려온다.

인간 쓰나미다. 짐짓 옆으로 양보하듯 양보 아닌 양보 같이 옆으로 밀렸다. 제길!

 아파트 모롱이를 돌자 봄바람이 와르르 안긴다.

 해가 우리 집 뒤로 슬며시 넘어가는 중이었고 바람은 해가 지는 곳에서 불어왔다.

 계단을 오르고 번호키를 꾹꾹 누르는 동안에도 사거리에서 만난 아이와 아이 엄마의 향이

아직도 남은 듯 향긋함이 코끝에 맴돌았다.

 

 몇 년 전 피죤 회장의 갑질 논란이 있었던 당시 잠시 다른 회사의 섬유유연제를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수십 년간 버리지 못한 나만의 애향인 피죤의 옐로우 미모사 향을 고집하며 지금도 그 제품만 사용한다.

 베란다로 나가 빨래를 걷어 안고 킁킁대며 향을 맡아본다. 향은 그리 진하지가 않다.

 은은한 향으로 강한 향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기려면 다음 세탁 시엔 세탁기 앞에 오도카니 서 있거나

마지막 헹굼 시간이 다 되어갈 때를 염두에 두고 때를 잘 맞춰 피죤을 반 통쯤 부어야 한다. 더러 그렇게 하지만

잊는 날도 많고 붓더라도 조금 더 부을 뿐이다.

 

 어쩌면 그 젊은 아이 엄마는 향을 그렇게 진하게 나게 할 수가 있었을까? 라며 빨래를 소파에 얹었다.

아무래도 빨래에서는 그런 향이 나질 않는데 사거리에서 맡은 샤프란 향내가 여전히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스치지도 않았고 그저 옆에서 잠시 신호를 기다리다 왔는데 그새 내게로 넘어온 향이 이렇게 오래도록

간다니 의아해하면서 주섬주섬 빨래를 개키기 시작하다 목이 말라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 근처에 가서야 기억이 났다. 아뿔싸!

 아이 엄마의 향이 예까지 따라온 줄 알았다니! 이런 착각이 또 있을까? 아침 설거지 후에 음식쓰레기 통과

배수구 마개며 이것저것 담아 락스 물에 담가두고 출근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온 집안 락스 냄새가 퍼져 있었으니 그것도 모르고 빨래를 걷어 코를 킁킁대고 애꿎은 아이 엄마의 향을

생각하며 다음 세탁 시에 섬유유연제를 더 부어볼까? 별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니 스스로 기가 막혔다.


 문이란 문은 다 열어젖히고 2차 설거지에 들어갔다. 방에도 킁킁~ 온 집안이 소독됐겠다.

나름 봄 향기라 생각하며 킁킁대다 향의 근원을 찾은 후엔 실없이 웃음만 실실 흘렸다.

 남녘보다 20일가량 늦어지는 봄 향을 미리 경험한 날이라고 여겨야지! 이런!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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