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 오면 어느 계절보다도 어렸을 적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추워서 가만 머리 싸매고 꼼짝 않으니
아릿한 추억으로 연명하고 있는 탓일까?
아주 어렸을적 초등학교 3, 4학년 즈음인 듯하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겨울이면 동네 어른들은 어느 한 집을
안방삼아 아침 밥상을 물리면 그 집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동네에는 주막이 있어 윗마을 어른들도 내려오시고
아랫마을 어른들은 물론이고 건넛마을과 뒷동네에서도
그 집으로 하나 둘 발길이 모이곤 했는데
우리 집은 그 집과 서너 집 옆에 길갓집이라
저녁나절이면 꼭 술취해 귀가하는 어른들을 흔히 볼 수가 있었다.
술을 거의 못하시는 아버지는 화투장을 들고 패를 뜬다거나
가끔은 한 두분 오시어 재미삼아 화투를 치기도 하셨다.
그리고 몇몇 분은 오시어 아버지와 두런두런 몸보다 큰 건전지를
고무줄에 칭칭 동여맨 라디오를 들으시며 뒤숭숭한 세상살이를
얘기하기도 했다.
근데 그중 한 분이 산판을 하셨는데 사실 산판이라는 이름이
산적처럼 와닿아 그분이 오시면 늘 무서웠다.
그분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불그스름한 빛이었지만
취한 모습은 아니었던 듯하다.
문제는 그분이 오시면 도망을 가야 하기 때문에 정말 싫었다.
아버지 옆 따끈한 아랫목에서 아버지에게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며
막내의 특권을 누릴 시간을 빼았겼던 이유도 있지만
그분이 오시면 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의 눈에 띄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가기 싫었지만 친구네로 놀러가야 하고 그리고 저녁해가 기웃이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에....
정말 무섭고 불안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이유인 즉,
그분은 딸이 다섯인 우리 집에 오시면 늘 막내딸을 사가겠다고
울아버지한테 당시 백원짜리 종이돈을 떡하니 건네면서
지금 데려 간다고 하시니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아버지 등뒤에서 바로 뒷문으로 줄행랑을 쳤었다.
그돈이 종이돈 500원짜리에서 옅은 핑크빛인지 살색인지
천 원짜리 돈으로 바뀔 때까지도 그분은 나를 팔으라고 아버지께
애걸하는 듯한 모습으로 장난을 치셨다.
아마도 제법 컸던 고등학교때까지도 그러셨던 것 같다.
그분은 염태식이라는 존함을 쓰고 계셨고
지난 여름 종로에서 여고 모임을 처음 나갔다가 시골 동네의
이름을 말하고 깔깔거리다가 그분의 조카인 염경화가 우리
여고 동창임을 알았다.
경화의 말에 의하면 작은아버지인 염태식이란 분은 자식이
아들 한명 밖에 없어서 늘 딸을 갖고 싶어하셨단다.
사람의 인연이 참 기기묘묘하다.
거기서 경화의 작은 아버지가 그분이었고 그렇게 딸로 삼고 싶어하셨다는
말씀이 그저 장난만은 아니었던가? 싶기도 했다.
요즘처럼 쌀쌀해지는 날이면 그분의 발걸음도 떠오르고
아버지의 웃음도 떠오른다.
나를 밖으로 내보내고 두분은 비밀얘기라도 나누셨을까?
이 겨울 내 어릴 적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